[추석 수상] 특별한 추석 나기

이명재 목사(본 신문 발행인, Ph. D)

부산 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을 하고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명절 방문을 이번엔 거르기로 작정한 직후였다. 못 갈 것 같다는 나의 말에 팔십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형님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완연했다.

코로나19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읽고 있는 형님도 더 이상 오라마라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가 아니었다면 좀 무리다 싶을 정도로 당신의 주장을 내 세웠을 것이다. 완고한 분이었다.

이번에 고향 방문을 하지 않기로 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10월 9일 한글날 조카의 결혼식이 잡혀 있다. 야외에서 그것도 최소 인원의 하객만 초청해서 예를 차릴 계획이라고 한다. 작은아버지로서 참석해야만 한다.

아무리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21세기라곤 하지만 일주일을 사이에 두고 연거푸 같은 지역으로 장거리 행차를 한다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다. 담 결린 허리가 온전히 풀어지지 않은 것도 신경이 쓰였다.

명절 날 집에서 소일하기로 마음을 정하니 갑자기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모처럼 사념(思念)의 무대가 이어질 것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갑자기 어제 초저녁 하늘 언저리에 걸려 있던 달이 떠올랐다.

보름을 이틀 앞두고 있었는데 달이 너무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보름은 안 되었으니 만월(滿月)은 아니더라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것에 버금가는 달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한참 모자랐다. 달을 중심으로 한 사고(思考)는 서양보다는 동양에 가깝다 할 것이다. 책력도 서양은 해 중심의 태양력을 쓰고 있고, 동양 특히 중국 문화권에서는 달 중심의 태음력을 주로 사용해 왔다.

서양의 과학마냥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이 정형화된 양태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모양을 보여주어야 인간에 대한 달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초저녁 달의 모습은 의외였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등 예술의 영역에서 많이 적용되는 감정이입(empathy) 말이다.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얹어서 바라보게 될 때 사실과는 무관하게 감정이 개입되어 해석될 소지가 있다.

빈약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저 달, 보름을 이틀밖에 남겨두지 않았는데 턱없이 채워지지 않은 달의 모습이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두 눈을 몇 번이나 닦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초췌한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 재난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의 시련이 나의 감정을 억눌러 달까지 일그러지게 만든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달나라까지 달려가서 순진무구하기만 한 달님을 극도로 위축시킨 걸까. 오만 가지 상념들로 모처럼 찾아온 여유가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명절 집지키기는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고향을 방문했다면 난 한 입으로 다른 두 말을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신문 기고를 통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고향 방문을 자제하자고 역설했다. 대신 보고 싶은 분들에게 선물을 보내자고 주창했다.

이것이 이번 추석 명절만이라도 작은 운동이 되면 좋겠다고 몇 번에 걸쳐 의견을 밝혔다. 나름대로 그것을 실천한다며 농산물을 비롯 몇 개의 물품으로 세트를 만들어 가까운 곳은 직접 전달하고 먼 곳은 택배를 이용해 보냈다.

선물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다. 물론 받는 것도 좋지만 주고 더 기쁜 게 선물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리라.

따지고 보면 나의 경우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아 다소 곤혹스럽다. 준비한 추석 선물 세트를 말했지만, 얘깃거리를 논한다면 받은 선물로 인한 것이 훨씬 풍성하다. 받은 선물로 인해서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이 선물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우리의 추석과 설을 2대 명절이라고 하는데, 명절이 다가온다는 것을 이 분이 보낸 선물로 알아차린다. 보통 명절 20일 전쯤에 스팸(spam)을 보내온다. 거르는 일 없이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였다. 건강에 득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농촌 생활하는 아이들이 스팸을 유난히 좋아했다. 공교롭게도 서울 사는 분이 명절 밑에 그것을 보내왔기에 우리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것이라고 감사 인사를 했더니 그것이 그분이 보내는 선물로 고정되었다.

또 한 후배도 역시 일 년에 두 번 명절 선물을 보내오는데, 매번 같은 이름은 아니지만 산삼을 액화한 제품들을 선물로 보내오고 있다. 이번 추석엔 '산삼배양근 진기력(眞氣力)'을 보내왔다. 아마 '형님'의 건강을 염려해서 보낸 선물이라고 여기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내는 내게 오는 선물을 두고 면박을 주곤 한다. "육해공(陸海空) 골고루 선물을 받아 좋기도 하겠수." '면박'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부러움 반, 면박 반이다. 어쨌든 선물을 함께 해결해야 하니 알콩달콩 관계를 잘 유지하는 일만 남았다.

오늘은 추석 전 날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번 추석 명절에 '고향 방문을 자제하고 대신 정성이 담긴 선물 보내기'를 권장하기 위해서이다. 코로나19를 퇴치하기 위해서 이번 추석에 국한된 이야기가 된다. 전염병은 사람을 통해 감염된다.

특별한 추석 나기이다. 명절 때 어려움을 뚫고 고향을 방문하는 것은 우리만의 미풍양속이다. 미풍양속을 이어가기 위해서 위기 때 절제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야위어 보이는 저 보름달이 통통하게 보일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