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일 교수의 생활산책 (45) - 김동길 교수의 어머니

문정일(목원대 명예교수, 수필가)

나는 개인적으로 김동길(金東吉) 교수를 잘 알지 못한다. 그 어른을 한 번도 만나 뵌 일도 없으며 심지어는 그분이 그 많은 강연을 하였지만 그 강연 현장에 한 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그분의 생각이나 주장뿐만 아니라 그의 어법과 어투(語套)까지 좋아해서 혹시 TV의 채널을 돌리다가 그분의 모습이 보이면 그의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킨다. 혹시 화장실의 용무가 급해도 웬만하면 꾹 참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곤 한다.

혹시나 그 어른과 내가 가진 공통점은 없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니 공통점 딱 한 가지가 있다. 나는 경진생(庚辰生)이고 그 어른은 무진생(戊辰生)이시니 《띠동갑》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김동인(金東仁)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도 닮은 구석이 없어서 “발가락이 닮았다”고 했다더니 오늘 《띠동갑》이라는 ‘억지 공통점’을 발견하고 나서 스스로 좋아하는 내 모습이 조금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TV에 나온 김동길 교수를 통해 그분의 어머니의 일화를 전해들은 것은 거의 40년 전의 일이다. 그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를 요약하면 대강 이러하다. 김 교수가 철없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홑이불을 빨아 다리미질을 하고 계셨다 한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스프레이’같은 분무(噴霧)기구가 없었으므로 어머니들은 대접에 냉수를 떠다가 한 모금씩 입에 물고 특별한 기술로 홑이불 위에 뿜어내어 홑이불 표면의 습도를 조절해서 다림질을 함으로써 구김살이 깨끗이 펴지게 하곤 했었다.

김동길 소년의 어머니께서도 역시 냉수 한 대접을 옆에 떠놓고 하얀 홑이불의 다림질을 하고 계셨다고 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개구쟁이 김동길 소년은 갑자기 ‘장난 끼’가 발동하여 어머니에게 엉뚱한 요구사항 한 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엄마, 여기 있는 물 한 그릇을 그 홑이불 위에 ‘확!’ 쏟고 싶은데요.” “꼭 그렇게 쏟고 싶으냐?” “그래요.” “그럼, 네 맘대로 한번 쏟아보렴.” 그는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대접에 담긴 물을 하얀 홑이불에 속 시원하게 쏟아 부었다고 했다. 김 교수의 특이한 성품을 문자로 표현하면 ‘호연지기(浩然之氣)’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길 소년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베푸신 관용(寬容)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김 교수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고향이 평남 맹산(孟山)인데 당시 아버지가 광산업에 종사하시다가 큰 빚을 지는 바람에 집안의 경제는 파탄이 났고 1년에도 수도 없이 거처를 옮겨 다녔으며 어머니는 혼자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면서 여러 아이를 키우며 가르치기 위해 남의 삯빨래나 삯바느질로 겨우 생활을 이어나갔다고 했다. 미루어 생각해보면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근근이 이어가던 그 어머니에게 어린 아들의 말도 안 되는 만용(蠻勇)을 흔쾌히 허락할 만한 그런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설령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여느 어머니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가 그런 엉뚱하고 괴팍한 요구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 “예끼, 이 녀석!”하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의 이웃들은 한 결 같이 그 가정의 생활이 구차한 것을 보고 큰딸(김동길 교수의 누나) 김옥길 처녀를 평양의 ‘권번(券番: 기생양성학교)’에 보내라고 권면했는데 그 어머니는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평양에서 고등여학교엘 보냈다니 참으로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 해야 하지 않을까? 훗날 그 딸이 이화여대 총장과 대한민국의 문교부장관이 될 것을 예견이라도 했었단 말인가?

김 교수 자신의 말씀처럼 당신께서 몇 년을 더 향수(享壽)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헌데 그분에게는 자신의 여생에 대한 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내가 죽으면 시신은 세브런스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남긴 재산은 연세대학교에 기증하게 됩니다.” 그 어른에게서 하늘이 주시는 믿음과 평강의 실체를 두 눈으로 보는 듯하다.

문정일 gcilbonews@daum.net

트윗하기

문정일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