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 주민등록증을 대신한 여권

"여보, 내 신분증 맡긴 것 좀 줘요. 이전 등록하는데 신분증이 필요하다던데..."

건망증으로 인해 아내는 소중한 물건을 가끔 내게 맡긴다. 오십 중반을 지나고 나서 그게 어느 정도 우리 부부 사이 관례가 되었다. 아내를 위로하느라 건망증 즉 '증(症)=병세'가 아니라 노쇠현상의 일종이라며 안심을 시켜도 곧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았어요. 내 단단히 모셔 놓았지..."

모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함께 바깥일을 보고 들어와서 주민등록증을 아내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아내의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보관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직도 그 순간의 장면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마침 책상 위에 작은 비닐봉투가 하나 있었다. 내게는 소중하지만 당장 쓰지 않는 물품들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논문을 저장해 놓은 카드형 usb, 쓰다 남은 딱풀, 10cm 자... 여기에 아내의 신분증을 넣은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책상 서랍을 다 뒤졌다. 전투에 임하는 군인처럼 소총 사격의 자세로 찾기에 나섰다. 책장 오픈된 공간뿐 아니라 틈새까지 꼼꼼하게 찾아보았다. 찾는 물건이 순순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 있게 대답한 것이 후회되었다. 아내에게 또 한소리 듣게 생겼다.

일 봐야할 시간은 다가오고 필요한 신분증은 어디론지 사라졌고... 무슨 수가 없을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다른 사람들에겐 낙관적 삶의 자세에 대해 자주 권하지만 도리어 나 자신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좋은 게 좋다 식으로 살아가면 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책상 서랍을 뒤지면서 본 아내의 여권에 생각이 미쳤다. 6년 전인가 단체로 중국을 여행할 때 한 번 사용하고 서랍에 묻혀 있던 여권이다. 투표를 할 때 신분증에 드는 증표로 여권이 포함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궁즉통(窮卽通)이라더니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배운 사람이 서류도 하나 작성 못하다니!

코로나19란 녀석이 우리 삶의 패턴을 싹 바꿔놓았다. 시청 민원실엔 일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댔다. 관공서 서류 작성이라는 게 대부분 서툴러서 스스로 완결짓기란 쉽지 않다. 좀 배웠다는 내게도 생소한 단어 투성이인데 농촌의 어르신들은 더 할 게 분명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주소 이름 생년월일 휴대폰번호 들을 메워나갔다. 모르는 난은 남겨두었다. 그 때 창구의 S 팀장이 우리를 안쓰럽다는 듯이 보면서 창구 쪽으로 불렀다. 그의 얼굴빛으로 보아 도와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좀 복잡하지요? 많은 분들이 서류 작성할 때 적이 당황하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수더분한 모습의 S 팀장의 말에 혼몽한 마음이 평정심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에게만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었다. 하루 전 날 자동차 등록 때문에 나는 그곳을 방문했었다. 10 여 명의 촌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물어가면서 서류 작성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 사람이 기특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해도 어느 시골 마을 이장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르신들을 돕기 위해 온 일행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헌데 그가 민원실 팀장이라는 사실을 내 일을 도와 줄 때 알게 되었다. 

이 수필의 중심 주제는 지금부터가 전개가 된다. 서류 작성을 돕는 팀장이 우리 부부의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권도 된다는 말에 나의 운전면허증과 아내의 여권을 내 밀었다. 조금 전 기본적인 신상을 적은 서류와 같이 전달했다. 써 넣을 것이 복잡하고도 많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 숫자 하나 잘못 적은 아내의 주민번호

S 팀장이 표 안 나게 우리 부부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빈 칸을 채워갔다. 그는 혼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입만 쳐다보았다. 서류 미비로 반려되면 복잡한 절차를 통과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해야 될지도 모른다.

"사모님 한글 이름을 씁니까 아니면 영어 이름을 쓰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신분증 대용으로 여권을 가지고 와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당연히 한글 이름을 쓴다고 말하고 그냥 넘겼다. S 팀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그리고 자리를 떴다. 잠시 뒤 돌아오는 그의 표정이 무척 밝아 보였다. 자리를 뜰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막혔던 문제가 풀렸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S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잠깐 자리를 뜬 이유도 되었다.

"목사님의 주민등록번호는 맞는데, 사모님 것을 잘 못 써서 혼동이 왔습니다. 주민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남성은 1로, 그리고 여성은 2로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2대신 5를 써 놓으셨어요. 외국에서 귀화한 분들이 5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의 것을 내가 외우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변하는 것이긴 하지만 몸무게 키 신발크기 등 모르는 것투성이이다. 폰 번호를 몰라서 매번 물어보다가 지금은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 불러오기 해서 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아내의 열세 자리 주민등록번호는 내가 기억하는 유일의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내를 동남아 여성으로 착각한 담당직원 

너무 과신한 나머지 뒤 번호 첫 숫자를 2대신 5를 써서 착각을 유발한 것이다. 외국인으로 오해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잖아도 가끔 아내를 동남아 여인이라고 놀리곤 한다.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 거기에다 머리칼까지 헝크러지면 영락없이 베트남 또는 미얀마 여성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S 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성 뒤 번호는 2로 시작하는데 5를 써놓으셨으니... 그렇다고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문제이고... 아니면 큰 실례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른 데로 가서 확인해 보고 온 거예요..."

나는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S 팀장 주위의 직원들도 같이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서 S 팀장은 농협 창구까지 가서 세금 납부의 일까지 도와주었다. 관공서에 일 보러 와서 이렇게 유쾌한 경험을 하는 것은 복(福)이다.

건망증... 해피엔딩으로 끝나다

지금 우리 김천은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운동 실천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것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건망증으로 시작된 어수선한 일과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기분 좋게 끝났다. 합력(合力)은 선(善)을 낳는다.

이명재 목사(본 신문 발행인, Ph. D)

이런 것을 두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면 될까.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 말이다. 아니, 소설이나 극에서 자주 쓰는 기법인 해피엔딩(Happy Ending)에 더 가깝겠다. 결론이 좋은 쪽으로 났으니까. 인류 공생의 길은 서로 도우며 생명 공동체 의식을 가질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저작권자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