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일(목원대 명예교수, 수필가)

현승종(玄勝鍾, 1919~2020) 前국무총리께서 102세를 향수하시고 지난 5월 25일 장서(長逝)하셨다. 현승종 박사가 국무총리 재직시절(1992~1993)이니 벌써 28년 전으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어른들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습관이 생활화 되어서 옷을 오래 입어 옷이 낡거나 해어지면 수선해서 입기도 하고 특히 바지나 양말에 구멍이 나면 비슷한 색깔의 천을 대고 꿰매어 입거나 신던 일은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번은 당시 현승종 총리가 입으시던 코트가 15년이나 된 것이어서 낡은 부분을 수선해서 입으셨는데 어느 기자가 이 내용을 신문에 기사화 했었다. 그 후 시골의 어느 초등학교 한 여학생이 玄총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새로 코트를 맞춰 입으시는데 보태시라는 사연과 함께 현금 10만원을 보내왔다는 갸륵한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기사가 신문에 난지 약 보름 쯤 뒤에, 국무총리실에서 玄총리가 그 시골소녀에게 답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금 기억나는 당시 총리의 답신은 서두에서 “내가 코트를 오래 입고 또 수선해서 입는 것은 새로운 코트를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옷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서였다”로 시작되는 상황설명의 편지와 함께 어린 소녀가 보낸 10만원에 총리자신이 고마움의 뜻으로 5만원을 보태서 15만원과 함께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필요한 문구류를 정성껏 포장해서 등기우편으로 발송하였다는 기사였다.

내가 대학생시절이던 60년대 중반 현승종 박사는 로마법을 강의하던 모교의 법학과 교수셨다. 그분은 학생처장의 보직을 맡고 계셨는데 당시는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던 시국이었다. 아마도 학생이 교복을 입었을 때와 사복을 착용했을 때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에 크게 차이가 있음을 묵시적으로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머리가 희끗희끗한 40대 후반의 현승종 학생처장은 당신이 스스로 교복상의를 입고 가슴에는 모교의 빼지까지 패용(佩用)하고 학생들이 등교하는 아침 시간에 정문에 부동자세로 서서 학생들을 맞으며 학생들에게 교복착용을 넌지시 독려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당시에는 전국의 대학들이 《한일국교정화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로 분위기가 시끄럽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인가 학생들이 수업이 진행되던 교실로부터 뛰쳐나와 운동장에 모여서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향해 돌진하려는 찰나에 현승종 학생처장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어서 운동장의 단상에 오른 학생처장은 학생들에게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에 임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때 앞쪽 줄에 있던 학생 하나가 학생처장을 향해 야유와 함께 불경스런 쌍말을 내 뱉는 것이었다. 코앞에서 모욕적인 현장을 목격한 학생처장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쏜살 같이 교단에서 내려와 그 학생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분위기가 매우 흉흉(洶洶)해서 다음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알 수가 없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십여 명의 법과대학 학생들이 달려 나와 학생처장에게 대신 정중히 사과하고 경솔한 행동을 했던 그 학생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실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승종 학생처장이 평소에 교수로서 어떻게 학생들을 대하고 가르쳤으며 어느 정도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장면이었다.

현 교수님의 세 아드님 중에 막내인 현선해(玄宣海, 1958~ )교수는 신일고등학교에서 나하고 사제의 인연을 맺은 사이인데 매우 예절바르고 인품이 선했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성균관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경영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모교인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처장, 도서관장, 부총장 등의 보직을 맡으며 중견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현승종 박사는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그 어른이 남기신 아름답고 존경스런 흔적은 앞으로도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고 본다. 玄 前총리의 안장식은 5월 27일, 가족장으로 대전현충원에서 열렸는데 장지가 대전이어서 나도 참석할 수 있었다. 유족과 내빈 모두 합하여 15명 정도가 참석한 안장식은 15분 만에 종료되었다. 코로나가 아직도 조심스럽다는 뜻일 것이다. 본 《생활산책》의 지면을 빌려 고인의 안식을 기원한다.

문정일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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