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일(목원대 명예교수, 수필가)

1970년대 중반, '월드비전 선명회회관'에서 기독교계 중고등학교 교사들 중심으로 3박 4일간의 ‘워크숍‘이 있었다. 인성훈련 및 학생상담과 관련된 주제였는데 각 팀마다 5-6명의 회원이 한 조(組)가 되어 프로그램이 진행 되었으며 우리 조에는 고등학교 교사 5명 외에 당시 기독교대학인 K대학의 교목실장, 韓 某(1922~2013) 목사님이 합류하고 있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털어놓기 어려운 자기 자신의 수치스런 부분을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어찌 보면 마치 공산당의 '자아비판'이나 가톨릭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냄새가 풍기어서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만일 화자(話者)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밝히지 않는 눈치가 보이면 청자(聽者)들은 화자에게 '피드백(feedback)'을 통하여 공격적으로 진실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때 카운슬링 용어로서의 ‘피드백‘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이윽고 韓 목사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여러분, 제 왼손을 보십시오. 새끼손가락의 한 토막이 없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일본군의 소대장을 하다가 8.15 해방을 맞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몇몇 뜻있는 친구들과 현지의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다. 그 가족들은 전쟁 중에 전사통보가 없었으므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아버지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던지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해방된 지 만 1년 후에서야 아들은 고향을 찾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역정을 내시며 그 이후 계속해서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진 아버지를 여러 차례 집에 업어오던 이 청년은 속이 상한 나머지 어느 날 가족들을 안방에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다시 술을 드시고 길에서 누운 모습을 발견하는 날에는 스스로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이 말에 놀란 아버지도 한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시더니 술에 깊이 인(癮)이 박혔던지 어느 날 다시 길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이미 선언한 대로 칼과 도마를 가져다가 부모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자르고야 만다.

그 사건이후 아버지는 술을 끊고 교회에도 다니게 되었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의 일부를 부모님 앞에서 절단함으로써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은 불효를 만회할 길이 없음을 그는 뒤늦게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한 순간의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패륜(悖倫)에 가까운 행동을 저지른 자신의 모습을 그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자기는 아직도 부모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오른 손으로 왼 손의 새끼손가락을 가리는 버릇이 생겼으며 목사의 신분이다 보니 예배에 참석하여 마지막 순서에 이따금씩 축도를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자신은 다른 목사들처럼 양손을 들고 축도하지 못하고 오른 손만을 들고 축도를 한다는 말로 그의 이야기를 끝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한국인들 중에는 과격하거나 다혈질인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따금 어떤 집에서 LPG가스가 폭발하여 사상자가 생겨나고 또 집이 전소(全燒)되는 TV뉴스를 접하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가스가 터지기 직전에 그 집에서 부부가 심하게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웃들의 증언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극단적인 자존감을 들먹거리지 말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로 인격의 성숙을 모색하자. 사람이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가 아니거든, 그런 정도의 '비본질적인 일에 절대로 목숨일랑은 걸지 말자.‘ 특별히 불쾌지수가 높은 무더운 날에는~~

문정일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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