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애정 그리고 황금

-내 안에 사는 이

                              / 정규훈              

정규훈(시인, 총신대 교수)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엄청 우습더라구-

손가락 깨물며

영원히 변치 말자던 벗들의 다짐이

지금은 눈보라 식은 밤처럼

서늘한 고독으로 맴돌고 있으니....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괜시리 입안이 씁씁해져-

하늘에 꽃을 바치며

평생을 사랑하자던 그 맹서가

지금은 낯선 하늘 아래

홀로이 구름처럼 떠돌고 있으니....

 

우정보다 애정에

애정보다 황금에 눈 먼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돼지게 부끄러워져-

친구도 애인도

가시 돋친 철책 밖으로 몰아내고

우정도 애정도

눈썹 너머 비웃음 아래 던졌으니....

 

그래서인지

거래차 만나는 사장님네와 어울릴 때면

엄청 우울해지더군.

 

그래서인지

꽃집을 나오는 연인들과 마주칠 때면

괜시리 흔들리더군.

 

그래서인지

상다리 휘어지는 음식상을 대할 때면

돼지게 배가 고파지더군.

 

망상의 이름으로 뱉아버린 우정과

환상의 이름으로 뒷발질 친 애정이

황금을 가슴에 얹고 사는

내 고립된 삶의 광주리에

다시금

폭동처럼

채워질 수 없을까?

 

벗들과 함께 하는 술사발에

맑은 달로 뜨고

사랑하는 이와 마주하는 식탁에

꽃봉오리로 피고

맨발로 걸어가는 나의 길에

강물처럼 흐를 수 없을까?

 

* 정규훈의 시는 쉽다. 시어가 평이해서 한글 해독자는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다. 허나 쉬운 시만 창조하면 밋밋할 것이다. 시 '우정, 애정 그리고 황금'을 받아 읽고 든 첫 느낌이 '정 시인도 난해한 시를 쓰네?'였다.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스쳐 지나갔다. 이 시에는 '내 안에 사는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것이 시를 이해하는 실타래 역할을 한다. 사람은 이상(理想)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다. 이 시에서 '우정'과 '애정'은 이상의 영역이다. '황금'은 두 말할 것 없이 현실을 대표한다. 이상적 삶이 좋아 시인이 되었고 대학 교수가 된 사람이 '상다리 휘어지는 음식상' 앞에서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닥친 현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현실을 이상으로 대체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묻는 식으로 이상의 세계를 소망하고 있지만 시인은 이미 이상의 나라에 속해 있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테크닉은 난해, 의미는 순수한 이런 시를 생산해내는 것은 시인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래서인지', '~수 없을까' 등의 반복 사용은 시의 묘미를 한껏 북돋게 해 준다. '씁씁해져', '돼지게' 등은 정 시인이 서울 사투리에 착안해서 만들어낸 시어이다. '벗-술사발-맑은 달', '연인-식탁-꽃봉오리', '맨발-나의 길-강물'로 성숙해 가는 시인의 생각이 그대로 우리의 마음에 와서 꽂힌다. 그렇다면 시(詩)는 느낌이고 사고(思考)를 무르익게 하는 좋은 도구인 셈이다(耳穆).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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