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날'에 쓰는 수필 -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아이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대학교 다닐 때니까 40 여 년 전의 일이다.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던 나는 종종 시내 대형 서점에 가서 아이 쇼핑(eye shopping=window shopping)을 하다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이 보고 싶고 값 싼 책을 발견할 땐 사고 했다.

나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구경하는 쪽이었다. 그 중에서 역사와 문학 관련 책 코너에 눈을 주는 시간이 많았다. 시집 등 얇은 책은 그곳에서 나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일순간에 독파해버리는….

서울 중심가 대형 서점은 만만한 나의 놀이터였다. 답답할 때면 버스를 타고 그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과제물이 있을 때면 서점 한 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필요한 부분을 베낄 때도 가끔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가난한 학생의 어려운 사정이 그러한 마음의 무게감을 줄여주었다. 직원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다. 이렇게나마 책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어느 날이었다. 아마 지금과 같이 신록이 우거질 준비를 할 때였던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서점에 들렀다. 시간이 아주 널널했던 것 같은 기억으로 미루어보아 주말이 아니었나 싶다.

예의 그 인문 사회 코너에 가서 이것저것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코너를 거쳐 책의 향연(?)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순례가 국격을 높이는 간접적인 동향으로 생각되어 뿌듯했다.

그 때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족히 50대 초반은 되어 있을 그를 '아이'로 표기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학생임에도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은 편에 속하는 아이였다.

가만히 보니 그가 집는 책은 그 또래 아이들이 즐겨 보는 책들이 아니었다. 역사책을 몇 권 골랐는데, 전공 서적 또는 논문을 모아 책으로 엮어낸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도 들어 있었다.

그 아이가 고른 책 중에는 대학생인 내가 미처 읽어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때 그 아이를 본 사람은 그가 책 심부름을 하러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바쁘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바쁜 부모님 아니면 서점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삼촌을 대신해서 책을 사러 온 아이? 하지만 그가 책을 고르는 눈과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목차를 훑어보기도 하고 중간 중간 책을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논문을 모아 엮은 역사책은 당시만 해도 한자 투성이어서 나이든 사람들도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책을 검토하는 시늉(?)까지 하다니…. 나는 궁금한 나머지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누구 책 심부름 왔니?"
"아니요."

"그런 어려운 책을 설마 네가 보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예요, 제가 볼 책이예요."

"네가 그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단 말이야?"
"이런 책들을 계속 읽어 왔어요."

"지금 몇 학년인데?"
"중 2예요."

나는 그 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 것과도 같은.... 우리나라의 국민 1인당 독서량이 선진국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을 때였다. 그 보도를 접하면서 적어도 나는 평균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고 자위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런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이 저런 이론서를 이해하면서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말에 대한 어휘력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고, 나아가 한문에 대해서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이와 더 이상의 대화를 진전시키지 않고 나는 황급히 서점을 빠져 나왔다. 그 이후 서점에 갈 때마다 아니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아이가 떠오른다. 한 번 스쳐간 인연이지만 그는 나의 사고력 확대에 크나큰 경쟁자로 자리잡아 왔다.

그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법고시를 패스한 판검사는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싸움에 능해야만 하는 정치인, 재테크에 능한 투자자는 더더욱 아닐 것 같다. 모르긴 해도 그는 지금 연구실에서 책과 씨름하며 탐구에 영일이 없는 중견 사학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4월 23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책의 날이다. 인터넷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는 말의 진가도 많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것 중 책 만한 것이 없다. 책의 날을 맞이하면서 책과 친구 되어 살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발행인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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