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해(민속학자, 안동대 명예교수)

한때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우리나라 독서계를 휩쓴 적이 있다. 당시에 박근혜가 정치적 전횡을 일삼던 암울한 상황이어서 어느 때보다 정의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까닭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시민사회로부터 정의에 대한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책 제목처럼 정의란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답한 것은 아니다. 여러 사상가들의 학설과 견해가 서로 경쟁하며 장단점을 드러낼 뿐 하나의 완벽한 정의론을 정답처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여러 문제적 사례의 해결을 두고 어떤 이론과 누구의 학설에 의해 처리하는 것이 더 정의로운지 다각적으로 따져보는 과정을 중심으로, 제각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 명망가들의 학설을 인용하며 논쟁적 토론으로 전개되는 서술 양식은 대학 강의에 적절한 수준의 저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의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긴요한 책이나, 실용적 지식으로서 정의를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시민들에게는 손에 잡힐 듯한 구체적인 답이 없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학술 저서가 아니라 교양 수준의 저서로서 정의론이 별도로 필요하다. 

그러한 필요에 적절한 교양서가 조성민 교수의 <정의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이다. 교양 수준에서 정의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인 책이다. 유수한 사상가들의 학설들을 끌어들여 고담준론을 펼치기보다 지금 여기서 겪는 우리들의 생활세계에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실감나게 모색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론되는 사례들도 서구사회의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저자가 직접 겪은 체험이거나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문제들이어서 매우 익숙하며 쉽게 이해된다.

특히 책의 전반부는 ‘자전적 정의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저자의 학창생활이 회고담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불우한 환경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학비가 없어 중퇴했던 위기의 중학생 시기, 입주과외로 전전하던 고학 수준의 대학생활, 그리고 벼룩시장과 청과물 시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한 미국 유학생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청소년 시절부터 인권의식과 정의감에 입각한 반골 기질이 있어서 아버지와 맞서기도 하고,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에서 일탈하는 위기도 겪었지만 결코 탈선하지 않았다. 언제나 인권을 존중하고 정의로운 삶을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정의사회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고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도 불법의 올가미가 씌워진다. 

유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로체스터 청과물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불법 상행위로 적발되어 미국정부로부터 추방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미국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상행위 신고를 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한번 내려진 추방명령은 어찌할 수 없다. 추방 명령에 따라 캐나다로 출국했다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고 재입국에 성공하는 과정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기도 하다. 위기를 넘긴 저자는 아내와 함께 학업을 계속하여 부부 모두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그 과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할 때에는 장사하던 자리를 정리해야 하는데, 장사가 잘 된 까닭에 매장을 탐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고향 사람으로서 평소에 많은 도움을 준 교포의 조카가 권리금을 주겠다며 물려달라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영남 출신 유학생으로 자비유학을 하는 처지여서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물려달라고 했다. 윤리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선택을 하려고 타당한 기준을 세웠다. 

어느 지역 출신인가, 고향 사람인가 아닌가는 윤리적 결정과 무관하다고 해서 배제했다. 권리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이익에 관한 것이므로 이 또한 제외시켰다. 마지막으로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는 도덕률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률을 두고 숙고하기에 이른다. 권리금을 주겠다는 교포의 조카는 은혜를 입었지만 매장이 없어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비 유학생은 매장을 물려받지 못하면 상당한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유학생에게 권리금 한푼 받지 않고 매장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그 유학생 부부는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부 모두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유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정의를 이론이나 학설에 의존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자신이 실제로 겪은 생활 현장이나 경험을 끌어와서 설명한다. 따라서 굳이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학술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자전적 정의론’을 따라가다가 보면 자연스레 정의로운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정의론을 설파하는 학자라기보다 정의를 실천하는 지성으로서 면모가 대학생활과 유학시절의 학문여정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성민 지음 <정의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좋은땅, 2021년 11월 출판)

전반부의 자전적 정의론에 이어서 후반부는 사회적 정의론으로 나아간다. 저자 개인의 경험과 학문여정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 내용을 일별해 보면, 기본적인 인권과 정의사회에서부터 국내 사회와 정치, 빈부, 언론, 검찰, 교육, 인구, 비혼 문제 등을 거쳐, 보수와 진보, 북한 인권, 신장 위구르족의 자결권에 이르기까지 40여 꼭지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한 꼭지씩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학술서를 읽는 것과 같은 어려움도 없다. 마치 한 편의 수필을 읽는 것처럼 쉽게 읽어나가다 보면, 인권과 정의와 윤리의식에 자연스레 눈뜨게 된다. 

여러 주제의 글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글이 ‘무불(無不) 정신’이다. 저자가 착안한 용어여서 ‘무불’은 사전에도 없는 말인데, ‘불가능은 없다’는 의미이다. 교원대학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이 임용고사의 좁은 문에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무불’ 정신을 표방했던 것이다. 학과 졸업생들에게 장학기금을 모금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불’ 장학금을 지급하는 전통을 수립했는데, 퇴임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무불 정신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사주의 용어가 아니라, 잠재된 가능성을 일깨우고 전망을 열어주는 긍정적 가치관이자 낙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하는 인문주의 정신이다. 시인 나희덕은 <가능주의자>에서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고 했는데, 무불정신은 “큰 빛이 아니어도” “반딧불처럼 깜박이며”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우어주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도 다룬다. ‘낙태의 자유냐, 태아의 생명이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 사이의 문제를 당사자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다룬 것이다.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과 전면적으로 허용하자는 주장 사이에 ‘사생활권, 행복추구권, 자유권, 생명권’ 등의 미묘한 권리들이 충돌한다. 그러나 합리적 판단은 전면 금지와 허용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다. 임신 기간에 따라 일정한 수준까지 허용하고 그것을 넘으면 금지한다는 것인데, 그 기준도 태아 생명권을 언제부터 인정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정의 실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변성이 있으며, 사회적 합의와 설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낙태 허용 여부가 자기결정권과 생명권 사이에서 충돌하는 문제라면, 비혼 여성이 정자를 기증 받아서 출산하는 문제는 자기결정권과 사회적 공인 사이에서 충돌하는 문제이다. 여성이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정자를 기증 받아 자녀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는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허용될 수 없다. 미혼모도 용인되지 않았지만, 아버지 없는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전통윤리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정이 다르다. 의학적으로도 정자 기증에 의한 비혼 출산이 가능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허용되는 사회가 되었다. 한국사회와 달리 유럽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특별한 제재없이 허용된다. 우리 사회도 지금은 금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허용될 가능성이 있다. 사회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윤리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유럽인들이 한국의 확진자 동선 추적을 두고 사생활 침해이자 인권 탄압이라고 비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가택연금을 당해 집안에서 갇혀 지낸 극단적 조치에 대해서는 인권 탄압을 거론하지 않고 침묵했다. 우리 정부는 시민들에게 그런 비상계엄 수준의 강압적 통제를 한 번도 가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인권과 정의는 당사자의 처지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 겪는 일인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적 정의에 매몰되어 정의주의자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저자는 인권과 정의 문제를 단일한 개념으로 명쾌하게 규정하지 않고 주체와 시대, 사회 등의 조건과 변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해석하는 열린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개념과 해석, 판단에 관해서는 융통자재한 관점을 지녔지만 정의에 관한 역사적 신념은 분명하고 주장도 꿋꿋하다. “인류문명은 개인의 자유, 평등, 존엄성을 존중해 왔던 역사와 함께 발전했다. 우리 사회도 결국 그 거대한 흐름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정의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다. 

저자는 정의에 대한 신념을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며 현장에서 온몸으로 실천하는 운동가이기도 하다. 요즘 추운 날씨에도 촛불집회 현장에 주말마다 빠짐없이 참석해서 정의사회 실현을 위해 힘을 보탠다. 최근에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 고문으로 활동하며 시위 참여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페북에서도 “몰상식과 불공정이 지배하고 있는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렵다”며, 현실 문제에 관해 거침없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 페북에서 제2독립운동을 표방하며 ‘TV조선 퇴출운동’을 새로 벌이고 있다. “죽기 전에 TV조선 퇴출과 조선일보 폐간이 소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나는 저자를 우리시대에 보기 드문 ‘실천하는 지성’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천하는 지성’이라는 표현은 좀 모자란다. 더 과감하게 말하면 ‘정의를 선동하는 지성’이라 해야 제격이다. 저자는 말과 글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정의를 선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 선동되고 있다.

취재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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