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청첩장을 갖고 대구 누님댁을 찾았다. 큰 누님이 10년 전 돌아가시고 대구 둘째 누님이 우리 형제자매 중 맞이가 되었다. 우편으로 발송하려다가 건강 등 근황도 살펴볼 겸 직접 찾은 것이다.

이 누님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삶을 살아 온 주인공이다. 지리산 밑 '깡촌'에서 전 가족이 대구로 이거(移居),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삶을 헤쳐 왔다. 누님의 고생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마침 집에 계셨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내겐 어머니만큼의 연치 차이가 난다. 허기사 누님의 큰딸-내게는 조카가 되는-이 나와 동갑이니 아무래도 허물없이 지내기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다.

"마실도 가시고, 운동도 할 겸 바깥출입을 자주 하셔야 할 텐데 집에만 계시네요."

"아이구야, 그러면 얼마나 좋것노. 하지만 다리가 결려 화장실도 겨우 다니는구마는."

몇 년 전 얼핏 누님이 척추 협착증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거기에 쪼그리고 앉아 하는 오랜 밭일로 무릎 관절까지 이상이 와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야야, 어디 용한 의사 좀 소개해 도고. 다리만 고칠 수 있다먼사 돈은 좀 들어가도 괜찮다. 모아 둔 돈도 조금 있고, 또 이 집도 내 앞으로 돼 있으니까네. 죽으면 그만이제, 천당으로 가져갈끼가 뭐 할 끼고..."

누님은 오랜만에 만나는 막내동생이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치의라도 되는 듯 매달렸다. 이럴 땐 다소 엉뚱한 문답도 필요하다. 누님의 간절함을 예의 없이 반농담 식으로 받아넘겼다.

"아니, 누님. 달덩이같은 아들딸들이 있잖아요. 그 아이들한테 알아봐 달라고 하지, 멀리 있는 내게... 병환에 대해서는 의사 손주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거고..."

누님은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러줘선 안 된다며 자형과 함께 밤낮 구분도 없이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가난 탓에 국졸 학력이 전부인 누님은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 적도 있다.

"뭐라 카더노. 일본 사람이라 카던데... 소나무 밑에서 낳았다고 해서 松下(송하)라 카던가. 일본식 이름도 있을끼구만 도통 생각이 안 나네. 그 사람은 돈을 주머니에 넣을 줄만 알았지 꺼낼 줄을 몰랐다는구마. 그래서 갑부가 됐다 안 카나"

지식의 활용과는 먼 생활을 해 온 누님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일본 사람의 이름을 한자 성으로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될 터이다. 가난 속에서도 아들 둘 딸 하나 교육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켜야 한다는 각오가 정말 대단했다.

이런 집념이 큰아들은 중앙은행의 지점장까지 역임하게 했고, 둘째 아들은 대그룹의 임원(전무)까지 지내게 했다. 딸은 대구 근교의 농장주로 연 수입은 두 동생이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들었다.

"아이고, 키울 때 자식이지 출가시키고 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용한 의사를 소개시켜 달라카먼 소개는 커녕 더 이상 진전 안 되게 하는 게 최선이라캄선 들은 척도 안 한다. 알겠나."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아이들 잘 키웠다는 자부심이 은연중에 묻어난다. 청첩장 직접 전달하러 왔다가 누님의 하소연 듣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치 빠른 누님이 대뜸 방문 목적을 물었다.

"동상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인사차 온 것만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몇 달 전, 대구 한 음식점에서 결혼식 전 양가 상견례를 했다. 갈 땐 상견례 마치고 누님댁에 들려 소식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양가 만남의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누님댁엔 들리지 못하고 말았다.

대신 이튿날 전화로 결혼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 그것보다는 직접 찾아뵙고 소식을 전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간단히 안부만 묻고 통화를 끊었다. 전화를 조금만 길게 해도 '전화세' 많이 나온다며 끊기를 재촉하는 누님이다.

그런데 이율배반적인 것이 당신이 궁금한 것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화기를 잡고있는 분이다. 아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물어볼 것이 무궁무진할 텐데. 사위 될 사람 나이며 하는 일, 고향, 부친이 뭐하는 사람?,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등등...

이런 미주알 고주알 오가는 전화 통화보다는 직접 만나서... 이것도 대구 방문의 충분한 이유가 됐다. 누님은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안 됐다며 냉장고에서 샤인머스켓과 귤을 담아왔다.

* * * * * * *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누님은 우리와 한 마을에 살았다.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가사일도 누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우리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누님, 나 어릴 때 어땠어요?"

이런 물음은 똑똑했지, 총기가 남달랐지 아니면 고을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지... 이런 유의 답변을 기대하고 물은 것이다. 어릴 때 천재 아니었던 이가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전혀 엉뚱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이구야, 이만하기도 천만다행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고 걷지를 못해 늘 엉금엉금 기어다녀서 엄마 마음앓이 많이 했제. 엉덩이를 밀고 다녔으니 엉금엉금도 아니지 함만... 옷에서 제일 먼저 해어지는 곳이 엉덩이 부분이었으니께..."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상상의 한 자락인지 모르겠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움직이는 나 어릴 때 모습이 비문(飛紋)처럼 어른거렸다. 명절빔으로 사 입은 새 옷도 예외가 되지 않아 어머니가 애를 많이 끓였다. 명절 뒤 끝, 밭일을 갈 때 막 입어도 될 헌 옷을 내놓고 가지만 새옷을 좋아하는 장애 악동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나의 꿈은 스스로 걸어서 등하교하는 것이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학교까지 가는 것은 거리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학교는 그렇게 이동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멀고 힘든 거야 감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모습을 마을 사람들 또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보여주나 창피하게... 차라리 학교를 안 다니는 게 낫지... 이런 생각에 둘러싸여 입학의 기쁨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걱정이 더 컸다.

부모님의 심정이야 당사자인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장애가 당신 탓이라도 되는 양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내가 입학 나이가 되자 부모님도 많은 고민이 따랐던 것 같다.

입학식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스파르타식 걷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늘 내 편인 어머니가 그렇게 매정한 분인지 몰랐다. 매정하다는 표현보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정도로 독했다. 엉덩이로만 움직이는 나를 걸어서 학교 보내고 싶으셨던 거다.

힘이 없어 다리를 제대로 작동할 수 없으니 1m를 못 가서 풀썩 주저 앉고, 어머니가 눈물로 세우면 또 조금 가서 넘어지고... 근 석 달 정도 훈련을 강행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그때 실망하는 어머니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입학식 날,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교문을 들어섰다. 교실의 내 자리까지 데려다 놓고 어머니는 총총히 사라졌다. 총총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얼마 뒤에야 알았다. 변이 급해 화장실을 가다가 내가 크게 넘어진 것이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안고 부축해서 이동을 시키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어머니가 번개같이 달려와 달랑 안고 화장실로 달렸다. 능수능란한 몸놀림이다. 나는 그때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보다 선생님과 친구들에 대한 창피함으로 고개를 못 들었다.

엄부자모(嚴父慈母)란 말이 있다. 나에게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로우셨지만 아버지는 도통 표색이 없으셨다. 장애인 아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인지... 사랑이 없어도 그땐 잘못을 나무라지 않는 것으로 족했다.

한데 그것이 아니었다. 지체 장애의 학생에게 가장 곤혹스런 시간은 체육 시간이다. 아이들은 제한된 공간의 교실에서 뛰쳐나와 쌓인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는데, 나는 한쪽 나무 밑에서 오도카니 서서 구경만 해야 했다. 읽기 쓰기의 우수성으로 대체한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3학년 가을이었다. 만국기가 걸리고 횟가루로 달리기용 타원형을 그리고, 천막을 쳐서 내빈석을 만들고... 가을 운동회 날이다. 이날은 차라리 결석을 하고 싶을 정도로 가기가 싫다. 하는 일 없이 오전 오후를 꼬박 잡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접 뛰지는 못해도 체육복은 준비했다. 부모님의 마음이 이랬다. 오전 경기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부모님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제각기 경기 내용에 대해 지청구들을 떨었다. 2등을 한 아이는 1등과의 차이가 없었는데 2등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어머니는 역시 통이 크다. 김밥이며 계란후라이 오징어조림 등 10인분 정도는 장만한 것 같다. 얼마 전 엄마를 잃은 영철이 몫도, 1년 전에 할머니 집으로 이사 온 미숙이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먹는 것만큼 즐거운 시간도 없을 것이다.

오후에도 여러 경기가 진행되었다. 내가 직접 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생생하게 기억된다. 400m 이어달리기 바로 전일 것이다. 100m 달리기이다. 다섯 명이 총소리에 맞춰 뛰어 1,2,3등을 가리는 경기. 5명씩 10개 팀이 뛰어 우열을 가렸다.

마지막 남은 학생은 네 명이다. 내가 뛸 수 있다면 5명으로 한 팀이 되는데, 그럴 수가 없다. 기권을 하더라도 출발선에 서서 온전한 팀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까? 아니지! 선생님과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때였다. 하얀 한복 저고리에 같은 색 홑바지를 입은 사나이가 홍길동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덥석 업었다. 아버지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나를 업은 채로.

폐회식 시간이다. 경기에서 등수에 든 아이들에게는 1등 공책 3권, 2등 공책 2권, 3등 1권... 이런 식이었다. 상장은 생략했다. 그날 전체 시상에서 승리의 깃발이 청군에게 돌아갔다. 백군에게 밀리다가 몇 년만에 이겼다며 환호했다. 백군은 '두고 봐라' 내년엔 깃발을 꼭 찾아오고야 말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폐회식이 끝나는가 했는데, 특별상 시상 순서가 있다고 했다. 순서에는 없는 상이다. 교감 선생님이 이번 가을 운동회에서 가장 크고 영광스런 상이지 싶다는 멘트 뒤에 내 이름을 불렀다. 운동회에서 내가 상을 받다니!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시상대 앞에 섰다. 감정 표출 없는 분의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상장과 상품을 등에 업힌 나에게 쥐어 주었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학교를 가득 채웠다. 난 운동회가 있던 날 밤 모처럼 푹 잠을 잤다. 행복한 밤이었다. 아버지의 숨어 있던 자식 사랑을 확인한 날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이듬해 겨울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은 뜨시고, 난 부산으로 전학을 가야만 했다.

* * * * * * *

누님댁 집은 단독주택이다. 건축한 지 오래 되어 건물의 노후화가 짙게 드러났다. 창틀에도 틈이 보였다. 바깥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청첩장을 손에 쥐어 주며 기도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식장이 어디고? 오메, 서울이네. 동상 애들 결혼식엔 꼭 가겠다고 오래 전부터 기도해 왔는데, 다리가 이 모양이 됐으니... 가만 있어 보거래이. 큰애가 혹 시간이 될는지 모르겠네."

청첩장에 올려져 있는 사진을 보려고 안경을 찾았다.

"조카도 예쁘기 그만이지만 조카사위 될 사람도 키가 훤칠한 게 잘 생겼네. 잘 살겠구마는... 아이구야 참 좋다"

누님은 나의 삶에 대한 증언자다. 어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것까지 꺼집어내어 스토리로 엮을 수 있는 분이다. 내 혼기가 찼을 때 가장 애 끓인 사람이 이 누님이다. 한 번은 서울에 있는 나를 보고 싶다며 차비까지 보내 내려 오라고 했다.

참한 아가씨가 나타나 선보는 것 때문에 불러내린 것인데,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직장은 좋긴 한데(그때 나는 교직에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몸 불편한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장애인과의 결혼은 많은 것을 감내해야만 한다고 여겼을 테니까.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인근 갈비탕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500m가 될까 말까 한 거리인데도 걸음이 더뎌서 길이 더 멀게 느껴졌다. 실버카가 아니면 이동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누님과 고인이 되신 자형을 생각할 때 ‘의지의 한국인’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부부가 트랙터로 함양에서 대구까지 여러 번 왕래한 사람들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식사를 하면서 여러 면에서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많은 고생을 겪었지만 아들 딸 훌륭하게 키워 자기 역할 잘 하게 했다. 누님도 노환 외에 큰 걱정 없이 생활하고 있다. 여기에 어울리는 말이 '고진감래(苦盡甘來)'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받아서 누님이 덕담을 했다. 아이들 출가 앞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장애의 몸을 갖고 반듯하게 세상을 살아가니 동상이야말로 고진감래에 적합한 삶이지 싶네’라고 했다. 그 참 열매가 이번 혼사가 아니겠느냐고...(이명재 作)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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