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주대의 <사람냄새>... 김주대 그림 산문집

김주대 지음 <사람냄새>(시와에세이, 2023년 10월 출판)

김주대의 <사람냄새>에 빠져들다

어느 날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을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건넸더니, 이런 책 말고 김주대 시인의 책이나 한 권 사 달란다. “무슨 책인데 못 사줄 것도 없지!” 했더니, 이십 몇 만 원짜리 그림책인데 주문을 하면 작가가 직접 사인을 해준다고 했다. “그건 책이 아니고 화첩인데, 화첩 사준다는 소리는 안했으니까”하고 토를 달며 슬쩍 어깃장을 놓았다. 값비싼 화첩을 가지는 것은 사치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남편의 옹졸한 씀씀이를 헤아려 포기했는지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더 조르면 사 줄 수도 있는데...’ 약간의 미련을 두고 있는 터에, 시인이 새로 그림 산문집 <사람냄새>를 펴냈다는 기사가 떴다. 그림도 썩 좋고 책값도 고만고만해서 아내에게 생색낼 요량으로 주문을 했다. 늘 내가 먼저 읽은 책 가운데 그럴듯한 책만 엄선하여 아내에게 건네주는데, 이번에는 “다음 달 독서모임에 추천하려고 그러니 먼저 읽어보라”면서 아내에게 열어보지도 않은 책을 먼저 주었다.

“어! 김주대 시인 책이네!” “내가 책은 사 준다고 했잖아.” 아내는 번듯한 화첩이 아니고 작은 단행본이어서 다소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뜻밖이라는 듯이 책을 반갑게 받아 표지 그림부터 자세히 살폈다. 나는 표지의 환한 꽃그림에 눈이 먼저 갔는데, 아내는 그림 속의 춤추는 사내를 더 눈 여겨 보는 것 같았다. 작가 김주대 시인이 춤추는 모습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작가 김주대의 그림보다 인간 김주대의 사람냄새에 더 취해 있구나!’ 생각하며 한참 잊고 있었다.

며칠 뒤 저녁 먹고 일어서는데 아내가 <사람냄새>를 돌려주며, “독서모임에 추천하면 안 되겠던데...”라고 했다. 윤석열을 비판하는 내용이 더러 있어서, 같이 모임 하는 사람들 공연히 부아만 지르고 운동권 책 추천했다고 욕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나 못지않게 우리 독서모임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다른 일에는 충분히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나와 정반대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내의 뜻을 받들어 독서모임에는 <사람냄새>를 두고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추천했다. 나는 원고를 쓰다가 지치거나 싫증이 나면 조금씩 틈을 내서 책을 읽는다. 한강의 소설과 김주대의 이 책을 독서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틈이 나는 대로 두 책을 제각기 조금씩 번갈아 읽기로 했다. 그런데 번갈아 읽다가 어느새 소설보다 이 산문집에 끌려들어 내처 읽게 되었다.

글보다 그림이 먼저 읽혔다. 내게 이 책은 산문집이면서 한 권의 화첩이었다. 문인화답게 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따습게 여겨지는 주홍빛 꽃잎들과 동자승의 발그레한 볼, 곧 날아갈 듯한 잠자리 그림들은 이 책을 한층 화사한 화첩이 되게 했다. 한국화다우면서도 그림의 주제를 과감하게 살리는 방식이 작가만의 독특한 구도를 이루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파격의 미적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좀 주제넘게 말하면 나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림 못지않게 글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죽하면 베스트셀러 소설을 제쳐두고 이 책부터 먼저 읽었겠는가. 새삼 궁금해서 되짚어 보았다. 도대체 어떤 글이기에 작가가 멱살을 잡고 나를 책 속으로 끌고 들어갔을까. 그 이유는 대수롭지 않지만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작가만의 글쓰기 방식에 있었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를 굴려 쓴 글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실제 삶을 현장감 있게 쓴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산문집’이라고 했지만,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글로서 ‘산’ 문이자 ‘산’ 문집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을 풍경화처럼 있는 그대로 그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 자신을 그 풍경 속에 놓아두고 그려서 독창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내용이 특히 재미있다. 따라서 그림으로 말하면 풍경을 그린 사생화이면서 작가 자신도 그 속에 그려놓은 초상화를 겸하는 작품이다.

초상화 기법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비범하거나 거창한 게 아니라, 예사 사람이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이어서 저절로 공감하게 마련이다. 가게 아저씨 아들도 되어보고, 밥집 아주머니 남편도 되어보는 것이어서,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안성맞춤인 그렇고 그런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인간 김주대가 실감나게 풍기는 사람냄새에 푹 빠져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소시민의 수준과 다른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작가 김주대가 아니면 겪을 수 없는 사랑과 낭만과 성취가 특별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는 시인이자 화가로서 두 가지 명성을 누리는 까닭이다. 어쩌다가 그의 시를 외우며 동경하고 있는 처자를 만나는가 하면, 그의 그림을 기어코 사서 소장하고 싶어 하는 아저씨가 전시장으로 찾아와서 만나기도 한다. 그와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전시회 관람자들이나 그의 사인이 담긴 작품집을 갖고 싶어 하는 독자들도 엄청 많다.

인간적인 소박한 상상력을 넘어서 작가로서 겪게 되는 뜻밖의 경험담이 때로는 소설 작품 이상의 뭉클한 사연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소시민의 꿈이라 말한 것은 시건방진 말일 수 있다. 작가 김주대가 시인으로서 또는 문인화가로서 누리는 명성은 아무나 본받을 수 있거나 흉내 낼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빌빌 돌아다니다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글이어서 ‘산 문’이라고 했는데, 정작 예사사람들은 따라 하기 어려운 경지라 할 수 있다.

돌아다니는 일이야 쉽게 할 수 있어도 작가처럼 사람을 살갑게 만나서 자기 초상까지 담아내는 글쓰기는 쉽지 않은 까닭이다. 작가만의 살아 있는 글이 되는 데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만나는 대상으로서 사람들이 남다르고, 둘은 찾아가서 만나는 방식이 별나다.

작가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알몸의 사람들이다.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이거나 식견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다. 밥집 아주머니거나 시골가게 아저씨, 정자지기 노인, 손수레 끄는 소녀, 민박집 할머니 등 한결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변두리 사람들이다. 오직 제 몸 하나 굴려서 벌어먹고 살아도 인심 하나는 따뜻한 이들이다. 따라서 그가 만나는 이들은 벼슬 냄새나 돈 냄새, 지식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온전히 사람냄새만 풀풀 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낮은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다음은 사람들을 만나는 별난 방식이다. 우연한 만남 같지만 한결같이 작가가 일부러 찾아가 만나는 사람들이다. 미리 정해 놓고 찾아가는 약속된 만남이 아니라 그냥 저냥 빌빌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사람을 찾아가 만난다. 따라서 모두 길 위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다. 찾아가되 한번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찾아가서 익숙하게 만든다. 좌판을 펴고 물건 파는 할머니가 있으면 자기를 알아차릴 때까지 몇 번이고 거듭 물건을 사러 간다.

그렇게 거듭 찾아가서 만나다가 마침내 그 사람 곁에 붙어 앉아서 그와 함께 한 장의 그림이 되고 한 토막의 이야기가 되며 한 자락의 사람살이가 된다. 작가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의 손님이다가 이웃이 되고 벗이 되어 일상이 되는 것이다. 작가라는 명찰을 떼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가 하면, 어머니의 시선으로 자신을 그저 그런 사람으로 그리기도 한다. 허름한 밥집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얼굴은 대충 씻고 속옷도 제때 갈아입지 않으며 아무 데서나 편하게 자는 것이 영락없는 뜨내기 수준이다. 자칭 ‘독거노인’ 아닌 ‘독거 중년’의 삶을 누린다. 작가라고 고상한 척 깔끔 떨고 잰 체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냄새만 찐하게 풍긴다. 어지간한 사람은 스스로 낮춤으로서 높아지는 이런 고수의 경지에 이르기 힘들다.

책을 읽는 동안 아쉽지 않을 만큼 여러 갈래의 사람냄새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그래도 시인이 쓴 책인데 사람냄새만 나것냐? 시 냄새도 물씬 난다. 여러 시편들이 있지만 내게 가장 서정적 충격을 준 작품은 ‘아버지 그 젊은 것이’다.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있고
목이 벌건 아버지는
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었다가 죽었다
그 후로 나만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되었고
죽은 아버지 나이를 한참 지나 생각하니
아버지는 평생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젊은 것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나이에 뭘 안다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걱정하며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을까
인생 더 산 선배로서 생각하니
죽은 아버지 그 어린 것이 짠하다

시는 허구적 서사로 구성된 소설과 달리 사실에 입각해서 진실을 말한다. 누구나 늘 보고 겪으면서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의 진면목을 시적 형상으로 오롯이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각성의 충격을 준다. 부모가 나보다 더 철부지로 살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부모들은 어른이 된 자녀들에게도 으레 아이 다루듯 조심하라고 당부하기 일쑤인데, 이 시는 그런 부자간의 노소관계를 일거에 뒤집어 버리는 반전이 충격적이다.

따라서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사무쳐 있는 사람들은 짠한 마음에 울컥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어떤 여성은 이 시를 읽고 한참 울었다고 털어놓았단다. 울고 나서 세수하고 화장 고치고 다시 와서 작가에게 저 시가 실화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무도 자각하지 못했던 보편적 진실을 시적 자아를 통해 그제서야 명쾌하게 알아차린 까닭이다.

더 보편적 진실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정서이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발생되는 인류 보편의 감정이 사랑 아닌가. 이 책에서도 글 여기 저기 그런 감정이 숨김없이 솔깃하게 이야기된다. 특히 ‘동해 건어물 처자’와 펼친 사랑 이야기는 참 아름답고 수준 높아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한층 달뜨고 설레게 만든다. 한껏 바람을 불어넣은 까닭에 바람난 독자들은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더 아래로 끌어내려 더 깊게 끌어가고 싶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작가가 직접 겪은 실화이니 꽤 부럽기도 하다.

게다가 ‘낯선 사내에게 잠자리를 팔다’는 글은 제목만 봐도 엉뚱한 상상으로 바람기를 부추기게 만든다. 앞에서 인용한 아버지 관련 시는 ‘반전’의 미학으로 충격을 주었다면, 잠자리와 관련한 이 글은 ‘착각’의 상상력으로 실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왜 그런가 하는 내용은 스포일러로 남겨둔다. 알려주면 독서의 묘미를 반감하게 만드는 탓이다.

이 밖에도 읽는 이들을 위해 숨겨두어야 할 대목들이 많다. 시를 잘 쓰고 싶거나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사람을 위한 작시법과 작화법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공개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이다. 아주 단순 명쾌하고 실효성 높은 작시 비법이자 작화 기법이어서 시인과 화가의 꿈을 키우는 독자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선물일 수 있다. 그럴수록 비법과 기법은 읽는 사람의 보물찾기로 숨겨 놓아야 마땅하다. 나는 작가의 그림만 보고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는데, 작화 기법을 읽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더욱 커졌다.

작가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인생론도 갈무리해 놓았다. 한 대목만 옮겨보자.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다. 부처님도 부처가 되려고 부처가 된 게 아니라 부처가 되다 보니 부처가 된 것이다.” 어느 스님의 말을 빌어서 한 인생론이다. 하기야 공자도 ‘논어’를 읽은 적이 없고, 예수도 ‘신약성서’를 읽은 적이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책 소개를 하다 보니 너무 나갔다. 인생론까지 나가면 나로서는 휘어잡기 버겁고 글을 수습하여 제대로 마무리하기도 힘들다. 이럴 때는 작가의 글로 마무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천공, 동갑내기 친구로서 한마디 함세’라는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하느님이 하느님 옷 입고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 봤는가? 부처님이 부처님 옷 입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것 봤는가? 진정한 도인은 도인의 옷을 드러나게 입고 다니지 않는 법일세.”

준엄한 꾸지람이다. 천공은 이 꾸지람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도인을 자처하는 자에게 당당하게 훈계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와 같이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다. 대단하게 위세를 떨치는 인간일수록 도인 행세하는 자에게 크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적이다. 도인 행각을 떠받들고 권력놀음을 우상화하는 시대에 오히려 예사사람들의 <사람냄새>가 더욱 거룩하다.

취재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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