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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많이 좋아졌다. 뭐라 그럴까. 발전했다고 할까 아니면 편리해졌다고 할까. 나의 젊은 시절 성탄절이 낀 연말연시가 떠오른다. 불편했지만 낭만이 서려 있던 시절이었다.

12월 중순에 접어들자 여기저기서 모바일 성탄 카드가 날아든다. 간혹 종이 카드를 우편으로 보내주는 분들이 없진 않지만 정말 그것은 '간혹'이다. 직접 그리고 쓴 카드에서 정성이 엿보여 좋다.

대부분은 모바일 성탄 카드다.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보내오는 모바일 카드도 있다. 이것도 작으나마 정성이 읽힌다. 인사말과 자신의 이름을 예쁘게 덧붙인 것에서 말이다.

받은 것을 복사해서 그대로 보내주는 사람도 있다. 여러 군데에서 모바일 카드를 받다 보니 사람은 다른데 같은 카드인 경우도 종종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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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매년 이맘 때면 모바일 성탄 카드를 만들어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올해는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나이 탓인가 했는데, 꼭 그것만도 아니다. 표나게 바쁘지도 않았다.

사방에서 모바일 성탄 카드가 날아들고 있다. 그중에는 30년 만에 성탄 카드로 인사를 해오는 후배도 있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어렵게 내 연락처를 알아내고 마침 성탄 절기여서 모바일 카드를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카드를 받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받은 자가 취할 도리이다. 처음 몇 년간은 받은 모바일 카드에 성경 말씀과 내 이름을 넣어서 보냈다. 그런데, 뭐라 그럴까. 좀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대를 나와 대기업 홍보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딸아이가 있다. 몇 년 전부터 그 아이에게 모바일 카드를 부탁해서 유용하게 사용해 왔다. 그 아이는 자칭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다.

나의 성향에 맞게 모바일 카드를 만들어줘서 잘 사용해 왔다. 좀 늦긴했지만 시간에 쫓긴 나머지 올해도 딸아이에게 SOS를 쳤다. 그런데 부정적 답이 돌아왔다. 유행성 A형 독감에 걸려 직장도 못 나가고 있다고 했다.

즉 모바일 성탄 카드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믿는 구석이 날아갔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대안을 찾아보아야 한다. 아내가 그려놓은 그림 중에 혹 성탄 카드로 사용할 작품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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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아마추어 화가이다. 시간 날 때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린 그림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은 촬영해서 SNS에 보관해 둔다. 성탄 카드로 활용할 것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진을 뒤지다가 찾아낸 것이 이 성탄 트리 그림이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온 것이 아닌, 아내의 창작물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몇 사람에게 모바일로 전송했다. 그리고 SNS에 올려 개별적 인사를 대신했다. 사진에 인사 글을 덧붙였다.

"'성탄절에' / 날씨가 매섭습니다 / 거기에 눈발까지 휘날립니다. / 이럴 때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 / 갑자기 추위가 달아납니다 / 즐거운 성탄 / 복된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 이 * * 목사 드림"

볼품없는 성탄 카드에 비해 돌아오는 인사는 '고마움' 바로 그것이었다. 과분하게 받아들여야 할 인사들이었다. 작품의 가치보다 마음을 읽어 주는 것 같아 울컥했다. 정(情)을 찾아내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한 후배의 댓글은 과거 대학 시절 빈핍한 삶을 기억나게 해 마음이 아렸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삶의 한 부분을 그가 들춰낸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것조차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나도 조금은 성숙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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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가까이 지난 이야기이다. 지금이라면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내용이다. 대학 생활의 낭만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고학생의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오롯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까.

'영업직 아르바이트생 급구'란 신문 광고를 보고 한 사무실을 찾아갔다. 서울 종로2가 보신각 뒤 허름한 건물 2층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간 것은 아니다. 사무 보조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던 내게 영업 일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머리숱이 뒷부분에만 붙어있는 사람이 나를 맞았다. 또래 혹은 나보다 몇 살 위쯤의 사람들이 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한참 뒤 내 면접 차례가 되었다. 사는 곳,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방문 영업을 해 본 경험은?

이런 기본적인 것을 물어본 뒤 하얀 종이 위에 '合格證(합격증)'을 검은 사인펜으로 써 주었다. 한자를 섞은 필체는 받는 이의 기를 꺾을 정도로 달필이었다. 면접 본 사람들은 구공탄 난로에 의지해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모두 내가 받은 그 합격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면접에서 탈락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영업을 나가기 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 쉽게 합격증을 받아 든 나는 교육이 아니었으면 그냥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대머리를 한 면접관, 그 전무라는 사람이 이동용 칠판을 설치한 뒤 교육을 시작했다. 그의 교육은 힘이 있었다. 그때 받은 교육 내용이 어렴풋이 아직도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음에 각인을 해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식을 초월한 화법’과 ‘인내심’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호기심이 일었다.

전무는 예로 두 사람을 들었다. 아직까지 그 사실 여부에 대해 조사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식에 어느 정도 부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한참 뜸을 들였다. 호기심을 촉발시키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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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영업에 필요한 두 사람을 등장시켰다. 상식을 초월한 화법의 사람으로 그가 든 이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이다. 미국 37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암살을 당했을 때, 첫 조문객으로 온 사람이 오나시스였다고 한다.

빈소로 조문을 가서 남편 잃고 황망해 하는 재클린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더 나아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빈소에서, 죽은 대통령의 미망인에게. 상식을 초월한 행위가 분명하다.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영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재혼함으로써 광고비 한 푼 들이지 않고 세기의 선박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용솟음쳤다. 굿을 하는 무당에게 힘을 얻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 이런 걸까.

두 번째 사람은 일본의 기성(棋聖) 사카다이다. 바둑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다. 다만 중국에서 기원해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꽃을 피운 것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가 사카다의 전성기여서 이름은 듣고 있었다.

사카다는 인내의 사람이라고 했다. 바둑에 취미를 두고 있지 않아 오나시스보다는 덜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일본 바둑계에서 사카다가 역전의 명수라는 것, 전세가 불리해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마침내 승리를 엮어낸다는 것.

이런 사실을 그는 침을 튀겨 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영업을 나가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매달린다면 판매 실적이 기대 이상 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한 번 해 보라고 했다. 자신의 말이 틀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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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고 바로 당일 영업 현장에 투입되었다. 일전에 문학 전집 외판을 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책을 팔기 위해 사무실을 들어갈 때의 두려움이 마음에 주홍 글씨로 남아 있었다. 방문할 때, 문 위에서 망치로 내리칠 것만 같은 조마조마한 경험. 책 외판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카드 판매를 하기 위해 사무실을 방문할 때는 뭔가 달랐다. 배짱이 생겼다고나 할까. 밑져봤자 본전이라는 심리도 작용했던 것 같다. 카드 한 매에 봉투 포함해 50원이었을 때니까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 그 금액은 그렇게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라고 하니 연민의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첫날 매상 실적치고는 스스로 생각해도 괜찮았다. 연말 한 달 정도 이 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팔다 남은 카드를 대학 교정에서 친구들에게 떠맡긴 일을 이 후배가 회억케 해 것이다.

이 경험은 내 삶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남 앞에 나서지 못하던 내성적인 성격이 많이 가시게 되었다. 또 가끔 상식을 뛰어넘는 언행으로 돈키호테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한 가지 작정한 일은 끝까지 밀어부치는 힘도 아르바이트에서 얻은 소중한 자산이다.

이것들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일본의 기성 사카다에게서 배운 것이다. 아니, 아르바이트 생들을 열정적으로 교육한 검은 외투의 대머리 전무님 덕분이다. 성탄 카드 얘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확대되었나. 후배를 탓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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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성탄 예배 준비할 것이 있어서 시내 마트에 나왔다. 코로나19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내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기쁘고 즐거워야 할 성탄 이브임에도 웬만해서 감성이 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지한 휴대폰에서 ‘카’‘톡’‘카’‘톡’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문자가 날아들고 있다는 신호음이다. 전국 곳곳에서... 귀가해서 답신을 보낼 생각을 하니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내용의 인사를, 저 사람에게는 저런 문자로.

볼일을 보고 들어가는 길목에 큰 절이 하나 있다. 불일사(佛佾寺)이다. 부처님 닮은 석상이 밤새 흥겨운 춤을 추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적지 않은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있기 때문에 오고 가는 길에 사찰 일주문을 바라보게 된다. 이 시간은 밤인데도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대형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 탄생하신 날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가랑눈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는 일기 예보가 흘러나온다. 귀가해서 성탄 카드를 보내온 분들에게 답장을 보내야 한다. 끝에 이 글귀는 꼭 넣어야겠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감사할 일 아닌가(이명재 作).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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