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홍선(紅線) 탈출 - 김천일보 김천iTV

고통도 고통이지만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코로나19라면? 일주일 안의 스케줄이 만신창이가 될 게 뻔하다. 그중에는 대학 특강과 시 주관 외국인 우리말 경연대회 심사도 포함되어 있다. 특강과 심사는 다중 앞에서 하는 것이어서 펑크는 금물이다.

처음엔 그래도 병원행을 미루고 버텨볼 작정이었다. 달포 전에 먹던 감기약이 몇 개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에 일조했다. 하지만 아내의 성화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옷을 대충 차려입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다.

완연한 겨울이다. 사람들이 걸쳐 입은 두터운 옷에서 먼저 겨울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추위를 이기려는 이들의 총총걸음에서도 겨울이 묻어났다. 코로나19의 여진 때문인지 마스크를 한 사람도 꽤 많았다. 옷처럼 마스크도 상용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19도 19지만 신형 독감이 유행해 보건 당국이 독감 주의보를 발령했다는 뉴스가 떴다. 그것 때문에 마스크 인구가 더 늘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길가 빈 종이 상자를 헌 유모차에 가득 실은 노파가 보였다. 저것으로 고물상에서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벌써 두 종합병원의 갈림길에 와 있었다. 시내에 있는 두 병원 중 한 군데를 정하지 못하고 번갈아 이용하고 있는 편이다. 오늘은 B병원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해피 투게더 실천 대회에서 기관 최우수상을 탄 것도 생각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병원은 언제부턴가 친절 지수가 급상승해 이용 환자들로부터 점수를 따고 있었다. 문병 1시간 무료 주차도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교차로에서 급히 핸들을 틀어 좌회전을 했다. 좌회전 신호가 꺼지고 황색 불이 들어올 때니까 설마 교통 위반 스티커가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요즘은 교통 감시 카메라가 급증해 조심한다고 해도 가끔 경찰서로부터 범칙금 통지서를 받는다.

병원 주차장은 만차였다. 빨리 진료를 받고 약 처방까지 끝내야 한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는데, 초장부터 진행이 더뎠다. 주차장을 몇 바퀴 돈 뒤에야 빠지는 차가 있어 겨우 차를 댈 수 있었다. 왠지 오늘따라 병원이 더 따스하게 다가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사람은 정말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다. 좋게 생각하니 사람뿐 아니라 관계 건물까지 좋게 보이니 말이다. 12월 초순인데도 병원 1층 로비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었다. 이곳은 기독교완 관계없는 병원인데...?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날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교계를 넘어 전 인류가 즐기는 축제의 날로 확대되었다. 교회 외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소엔 으레 대형 성탄 트리가 세워진다. 이 병원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고객을 배려한 결과라고 하겠다.

금요일 오후여서인지 접수창구가 몹시 붐볐다. 대기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린 뒤 겨우 접수를 할 수 있었다. 보호자로 따라온 아내가 일 처리를 맡아 해 주었기 망정이지 내가 스스로 하려 했다면 매우 힘들었을 거다. 2층 이비인후과로 가라고 했다.

엥? 독감 의심 증상인데 왜 이비인후과지? 내 생각으로는 내과에 더가까울 것 같은데...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이비인후과가 맞을 것 같다. 耳(귀) 鼻(코) 咽喉(목구멍)를 다루는 곳이니까. 가래는 인후, 기침도 인후, 콧물은 비, 깊은 기침엔 귀도 윙윙거리니...

2층 이비인후과 진료실로 올라가면서 혼자 언어유희를 즐겼다. 담당 간호사에게 접수증을 전달했다. 먼저 체온을 쟀다. 38.6도. 진료차트에 체온을 기록하면서 열이 좀 있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식은땀이 나고, 귀가 화끈거리는 등 열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혈압은 어떻게 되는지, 측정기에 오른팔을 넣고 시작 보턴을 눌렀다. 붉은색 숫자가 계속 올라가더니 일정 지점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고 163, 최저 111.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혈압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높은 편이긴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유행성 독감 때문인지 이곳에도 대기 환자가 여럿 있었다. 대부분 연로한 사람들이었다. 딸이 모시고 온 고령의 아버지, 아들이 손잡고 온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그리고 한 젊은 청년은 세 분의 노인을 모시고 왔는데, 근처 요양원 종사자 같았다.

병은 초기에 잡지 않으면 치료 기간이 길어진다. 내가 다른 때보다 일찍 병원을 찾은 것에는 이런 말에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진료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OOO님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했다. '님'은 의존명사니까 고유명사와는 결합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허기사 잘못된 언어도 자꾸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들리게 된다. 6,70년대 다산(多産)으로 우리나라 인구가 급증했다. 정부에서 안 되겠다 싶어 산아제한 정책을 폈다. 그때 나온 구호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이즈음 여성계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봉건시대도 아닌데 왜 아들이 먼저냐? 이건 산아제한 정책과도 배치된다, 다산의 원인 중 남아선호 사상도 한몫한다 등의 이유를 댔다. 일리가 있다하여 관계 당국이 아들과 딸의 순서를 바꿨다. '아들딸' 하던 것을 '딸아들'이라고 부르니 처음엔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구호도 한 단계 발전해 그 다음은 이런 구호까지 등장했다.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출산률 0.77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 생각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이름 밑에 '님'자를 붙이는 것도 지금은 그렇게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젊은 의사 선생님의 친절은 여전했다. 웃음을 섞어가며 병세를 물었다. 진료 결과가 나오기 전에 벌써 병이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몇 년 전 다른 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담당 의사의 불친절로 병이 도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불친절이라고 하기엔 뭣했다.

불친절했다기보다 AI 상담원이 응대할 때의 그 기계적인 대답 같은 것 있지 않은가. 너무 사무적이어서 딱딱하기가 그지없는, 인술의 향기를 기대한 환자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한... 사실 그로 인해 이 병원 이용을 상당 기간 중단했었다.

명의는 정확한 진찰에 더해 환자의 입장을 읽어주는 마음이 중요하다. 의사의 긍정적이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에 병이 씻은 듯 나은 것 같은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이게 맞긴 한 데 말처럼 쉽지 않다고 의사들은 읍소한다. 하루에도 쉼 없이 환자를 진료하는 입장에서는...

갑자기 수단의 오지 마을 톤즈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다가 48세로 세상을 뜬 이태석 신부가 떠올랐다. 그는 수단의 슈바이처란 별칭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로서 안정이 보장된 삶을 뿌리치고 신학을 공부해서 신부가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얼까?

그는 의료 불모지 아프리카, 그중 대륙의 중부지방에 있는 수단, 수단에서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 마을 톤즈. 여기에 똬리를 틀고 의료 선교와 교육 사업에 집중했다. 그로 인해 톤즈 마을은 살맛 나는 지역이 되었다. 모두들 이 신부를 성자라고 했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수단 사람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했다. 고국 방문길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이걸 어떡하나! 대장암 말기 진단이 나왔다.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이 신부는 48세라는 이른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K 감독이 이 신부 사후 10년 되던 해 톤즈 마을을 찾았다. 변화된 모습을 영상에 담기 위해서였다. 좋은 소재가 있으면 한 편의 영화로 제작할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먼저 이 신부가 세웠다는 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건물과 내부 시설이 몹시 엉성했다.

뭐라 그럴까, 1960년대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던 재건학교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그렇게 초롱초롱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뭘까? 이구동성으로, 의과대학을 나와 이태석 신부님처럼 인술을 베푸는 것.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졸업생들이 많다고 했다. K 감독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보였다. 영화 한 편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K 감독은 이 학교 졸업생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예정된 체류 기간을 훌쩍 넘겨 졸업생들을 찾아 나섰다.

우리와 같지 않아 통신 시설이 형편없었다. 졸업생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현지 관계자들이 자신의 일처럼 도와 준 덕택에 80명의 졸업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모두 수단을 움직이는 리더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사로 일하고 있거나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는 졸업생이 57명이나 되었다. 나머지는 공무원, 교사, 대통령 경호실 직원 등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작은 시골 학교, 시설이 낙후된 교사(校舍)에서, 이태석 신부의 봉사와 헌신이 깃든 그 학교 졸업생들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의사와 의사 지망생들이 많은 것은 오롯이 이태석 신부의 영향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K 감독은 마침 기회가 닿아 이 학교 졸업생 의사들의 의료 선교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졸업생들은 모두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이다. 이태석 신부 이야기를 길게 삽입하는 이유가 있다. 인술이 뭔지, 환자 중심의 진료가 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풍토성이 다르고 사람이 달라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의료 선교를 나간 곳은 5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이날 모인 환자들은 150여 명이었다. 인근 마을에서도 치료받기 위해 환자들이 많이 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의사에게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야 할 운명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색적인 모습은 한 사람의 환자도 예외 없이 얼굴을 찡그리고 왔다가 환하게 웃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완쾌되어 퇴원하는 환자처럼... 궁금증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폈다. 진료가 우리가 보아 온 것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그렇지 않은 경우가 극소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가 아파서 왔지요?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나요? 지금 가장 아픈 곳이 어느 부분이죠? 앓고 있는 병은 없나요?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은? 처방전을 받아 원무과 가서 계산한 뒤 약 조제 받아 돌아온다.

그런데 수단의 이 의료 선교팀은 그게 아니었다. 환자의 일상생활, 가령 아이가 몇인지, 애 아빠의 수입으로 생활은 되는지, 식수는 잘 공급받고 있는지, 촌장의 횡포는 없는지... 이런 것을 미주알 고주알 물어본 뒤 진료를 한다. 시간은 다소 더 걸릴지라도 의사와 환자간 래포(rapport)가 형성되어 치료의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이다.

K 감독은 의료 봉사가 마무리된 뒤 봉사한 의료진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진료 방법을 대학에서 배웠느냐고?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사용하신 방법인데, 우리는 그분을 따라 하는 것뿐이라고. K 감독은 이태석 신부의 환자 사랑이 제자들을 통해 저렇게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비인후과 담당 의사는, 혈압이 조금 높지만 이건 왔다 갔다 하니까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 미열에 기침이 있고, 가래가 끓고 콧물이 나와서 독감인가 했는데, 검사 결과 독감도 아니라고 했다. 코로나19 검사 여부엔 사흘 전 했는데 음성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해 보라고 당부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폐렴인데요, 비용이 그렇게 비싸지 않으니 X-레이 한 번 찍어보시지요.” 노인들이 폐렴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종종 들어 온 터라 은연중 겁이 났다. 1층 방사선과를 가는 도중 몇 사람의 지인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병원 심방 오셨느냐고 묻기도 했다.

X-레이는 다행히 대기 손님이 없어서 바로 찍을 수 있었다. 촬영 기사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겉옷뿐 아니라 와이셔츠도 벗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X-레이에 안 잡히는 단추가 있긴 한데 내가 입은 셔츠 단추는 잡히는 것이어서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접수증을 받아들고 다시 2층 이비인후과로 갔다.

"폐렴도 괜찮습니다. 감기에 피곤함이 겹쳐서 온 병이니까 약을 좀 세게 조제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침은 물약으로 드릴 거구요. 체온이 떨어지지 않거나 목이 따끔따끔하면 코로나19 검사를 꼭 해 보시고, 확진 시 병원으로 바로 오셔야 합니다. 오늘 약은 일 주일분입니다."

의사의 세심하고 친절한 설명이 고마웠다. 병의 반은 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내가 원무과에 가서 계산할 차례다. 올 때보단 덜 했지만 그래도 번호표를 뽑고 잠시 기다려야 했다. 원무과 앞에는 남녀노소 환자들이 오갔다. 그들을 보면서 상념에 잡혔을 때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서너 살이 되었을까. 링거를 여린 팔에 달고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우다가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 앞으로 달려가서 덥석 안겼다. 아이의 아빠였다. 아이는 아빠에게 매달려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했다.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아빠 엉덩이를 차기도 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저런 때가 있었는가. '엄부자모(嚴父慈母)'란 고리타분한 말을 들먹이며 아이들을 애 엄마에게 맡기고 무슨 중차대한 일을 한다고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녔으니...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로비에 틀어놓은 대형 TV에서 비슷한 주제의 가족극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내가 가까운 약국에서 약을 지어왔다. 일 주일분인데도 검은 비닐 봉투를 가득 채우는 양이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독감이 아니어서 다행이긴 한데, 또 다른 걱정거리가 몰려왔다. 이렇게 아픈 데 독감이 아니라면 혹 코로나19? 불안한 마음이 확신 쪽으로 점점 근접해 갔다.

"여보, 집에 코로나19 진단 키트 있지? 지난번 서울서 온 손님이 선물로 가져온 것 말이오."

"글쎄, 어디 두었는지 정확히는 기억에 없네요. 어디 있긴 있을 거예요. 가서 찾아보지요."

귀가 하자마자 아내는 신속하게 1회용 자가 진단 키트를 찾아왔다. 설명서대로 꼼꼼히 검사를 진행했다. 멸균 면봉을 코에 깊숙이 넣고 여러번 돌린다. 채취한 면봉을 검체추출용액에 넣어 여러 번 젓는다. 용액을 카세트에 세 방울 정도 떨어뜨리고 10분쯤 기다린다.

이렇게 한 뒤 카세트에 붉은 줄을 예의 주시했다. 몸에 이상 징후가 있어 정밀 건강검진을 받고 혹 중병이 아닌지 기다리는 심정이 이 같을까. 희미하게 한 줄 붉은 색이 보였다. 한 줄이면 음성, 두 줄이면 양성으로 코로나19 확진이다.

양성일 경우 두 줄이 동시에 나타나는 건지, 아니면 한 줄이 마무리된 뒤에 또 다른 한 줄이 표시되는 건지. 마음 졸임은 계속 이어졌다. 붉은 한 줄이 제법 선명해졌는데도 다른 한 줄은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코로나19 음성이었다.

감기몸살 기운은 여전했다. 콧물 때문에 계속 휴지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도 기분만은 가뿐했다. 하루 동안 하늘과 땅을 오간 것 같다.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하고 약을 찾았다. 줄줄이 사탕 모양으로 길게 달려 나왔다. 아침 점심 저녁, 식후 30분 후. 약을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켰다.

창밖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기세였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보았다. 2023년, 딱 한 장 남았다. 12월의 첫날, 이날은 홍선(紅線)이 온통 내 마음을 헤집어놓은 날로 기록된다. 붉은 줄 하나 또는 두 개의 상(像)이 나를 집어삼킨 날이다. 하지만 이제 벗어났다. 홍선 탈출!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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