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며칠 전, 이제는 손아들을 둔 나이의 제자들과 함께 회식하는 모임이 있었다. 경기도 구리시 근처 도농의 어느 음식점에서다. 20여명이 모인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40여년 전 종로구 인의동 종묘 동쪽 담에 붙어있는 서울중앙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때, 그 교회의 허락과 지원을 받아 1970년대 중반부터 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때 학생이었던 제자들이 모처럼 회포를 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초청해 주었던 것이다.

교회의 이름을 따서 만든 ‘서울중앙고등공민학교’에는 고등부와 중등부를 두었다. 중등부를 잠시 두기는 했으나 고등부 진학을 위해 둔 것이었다. 고등부 3년은 대학입시를 위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기간이었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할 자격을 얻도록 하는 기회였다.

졸업생이 4회까지 나왔으니 학교는 약 7년동안 계속된 셈이다. 제 1회 12명 졸업생을 비롯하여 2회 9명, 3회 29명, 4회 19명이 적을 두었거나 졸업을 했다. 그 동안 동기들끼리는 서로 소통이 있었고 일년에 몇 차례씩 모이기도 하면서 과거 어려울 때를 회상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같이 연합으로 모인 것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고등공민학교를 찾은 젊은이들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배우려는 이들로 학령기를 훨씬 넘긴 이들도 있었다. 근처에는 동대문과 청계천이 있어서 그곳 시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1970년 11월 말에 분신자살한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이 교회에서 멀지 않았다.

저녁에 와서 졸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낮에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고 왔는가를 보는 듯하여 애처로웠다. 힘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교사들은 정성을 다해 가르치면서 때로는 위로해주고, 많은 경우는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면서 격려해 주었다.

당시 고등공민학교의 교사로 활동한 이들은 서울중앙교회의 대학부 학생들이었고, 개중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과목에 따라서는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친구의 권유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날 저녁 회식에 참석한 교사로는 나와 유재열 선생 내외 뿐이었지만, ‘학생들’이 기억하는 선생님들은 많았다.

그 날 저녁 ‘학생들’은 손봉호 교수를 비롯하여 김유신 우창록 백종국 박영태 김선봉 그 밖에 내가 놓친 이름들도 거론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기억되는 분들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서울중앙교회 대학부에서 자란 제자들이었다. 손봉호 교수와 나는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과목을 맡지는 않았으나, 주로 채플을 통해 전체 앞에서 훈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인 김에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를 들어보자고 했다. 고등공민학교를 마친 후 대부분은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진학을 했고, 어떤 학생은 생활전선에 바로 뛰어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매우 다양했다. 외국인 회사의 자문역, 조경사업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바둑 5단의 실력으로 기원을 경영한 사람도 있었다.

생활전선에 곧 나섰던 학생은 “안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뛰어 지금은 여러 사업체를 두게 되었고, 그 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였는데, 앞으로 사회복지에 헌신하겠다고 했다. 모두들 자신들이 중고등학교 시절 배움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자녀들의 교육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기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가를 들을 때 나는 이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의 그 염원을 자녀들을 통해 해결해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다. 미국에 이민한 ‘여학생’은 아들을 유명대학에 입학시키는 데 힘을 쏟았고, 공직생활로 자녀 셋을 키워낸 엄마는 선생 앞에서 그걸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주례를 서서 결혼했다는 목사는 아들딸이 의료계와 법조계로 진출하게 되었고,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는 제삼세계에 선교사를 파견, 40여 개의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내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것은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소년 시절 어렵게 살면서 옆으로 새지 않고 이렇게 살게 된 것은 서울중앙교회 고등공민학교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날 모인 ‘학생들’이 대부분 신앙생활을 잘하게 된 것도, 그들의 간증에 의하면, 고등공민학교 때문이었다고 한 것은 과장이 아니라고 믿는다.

삐뚤어진 길로 갈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도 선생님들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올바르게 생활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말을 할 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저녁에 모인 이들 중에는 멀리 청주와 병점 그리고 경기도 파주와 고양에서 오기도 했다.

졸업생들 중에는 앞으로 나눔의 삶을 살겠다고도 했고, 또 과거 자기들이 다녔던 공민학교와 같은 기관들을 돕겠다고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40년 전의 그 교육이 정말 보람있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이들의 경험담을 통해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용기도 갖게 되었다.

취재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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