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동안의 병원은 조용하다. 심야의 병실은 숨소리밖에 안 들린다. 작은 신음소리 조차 크게 들릴 정도다. 간호사들이 처치카를 끌고 병실을 돌 때만 다소 소리가 날 뿐이다.

어젯밤 링거액을 놓기 위해 주삿바늘을 꽂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혈관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왼팔 곳곳을 살핀 후 겨우 찾은 곳이 왼팔 아랫부분인 손목 위 팔뚝이었다.

"응급실에서 주사 놓을 자리 찾느라고 애썼다는 게 이해가 갑니다. 링거액을 놓긴 했지만 혹 이상 증상이 발견되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링거액 바늘 꽂은 부위가 깔끔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라 그럴까, 좀 찌부둥한 느낌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고 1시간쯤 흘렀을까. 바늘 꽂은 곳 주위가 눈에 띄게 부어올랐다.

종합병원 간호사실(글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진임)

지나가는 증상이겠거니 하고 그냥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 간호실에 가서 증상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몇 해 전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미 S병원에 입원했을 때다.

허리 부분에서 두 다리로 이어지는 신경을 눌러 걸음 걷기가 힘들었다. 협착증 같다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S병원에 입원을 했다. 링거 주사 바늘을 잘못 꽂아 팔이 퉁퉁 부어 올랐다.

"밤을 새워볼까 하다가 아니다 싶어 왔어요. 팔뚝이 많이 부어 오른 것 같아서요"

"어머, 많이 부었네요. 잘 오셨어요. 앞으로 벨을 누르시면 저희가 달려 갈 게요. 간호사실로 들어오셔서 의자에 좀 앉으세요."

얼굴이 갸름하고 인상이 좋아보이는 간호사가 주사 도구를 챙겨와서 바늘 꽂을 부위를 탐색했다. 팔뚝 곳곳을 손톱으로 누르기도 하고 또 손바닥으로 탁탁 쳐 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해도 적임지(?)를 찾지 못했다. 간호사가 당황하는 모습을 비치더니, ‘잠깐만요’ 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수간호사를 데리고 왔다. 풍기는 모습에서 관록이 느껴졌다.

"팔이 많이 부었네요? 오른팔에 놓으면 불편해서 안 되겠지요? 가만이 있자, 손등은 아무래도 안 되겠고…"

수간호사는 왼팔 몇 군데를 만지더니 서슴지 않고 바늘을 꽂았다. 과연 노련한 간호사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아이스팩을 꺼내주면서, 잘 때 부기 부분에 대라고 말했다.

야근하면서도 친절하게 정성을 다하는 간호사들이 고마웠다. 입원해서 환자복을 입으면 누구나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80 중반의 할아버지는 손녀뻘밖에 안 되는 간호사들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한다.

밤 11시가 되었을 때 수간호사가 우리 병실에 와서 각별한 관심을 가져준다. 아이스팩을 부어오른 나의 팔 부위에 대고 압박 붕대로 고정시켜 주기도 했고, 오전 외출해서 처리한 내 일의 결과를 물어보기도 했다.

내 서랍장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을 보고 좀 봐도 되겠느냐고 했다. 얼마 전 지은이로부터 선물로 받은 시집이었다. 표지 안쪽에 실려 있는 시인 소개 사진을 보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시인이 정채봉 작가를 닮았군요. 선한 인상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그런 분위기였다. 정채봉의 동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고 밝게 만드는 데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다. 나도 한 때 그의 글을 즐겨 읽은 애독자였다.

"월간 샘터를 수십 년간 정기 구독하고 있어요. 법정 스님, 최인호 소설가, 정채봉 동화 작가 등의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책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그러잖아도 근무하시는 중 틈틈이 책 읽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어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세태에..."

그랬다. 병원 5층에 간호사실(nurse' station)이 두 곳 있는데, 간호사들이 7명씩 14명이 교대로 근무한다. 틈이 날 때 책으로 눈을 고정시키는 사람은 이 수간호사가 유일했다. 대부분 스마트폰이었다.

얼마 전 뉴스에 난 기사를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2030세대의 월 도서 구입비가 9천원 대로 떨어졌다는 기사였다. 1만원 이하로 떨어진 것은 처음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하는 기사였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가 3만원대를 상회하고 있고, 이웃 일본만 해도 월 2만 5천원을 도서 구입비로 지출하고 있는데 비해 턱없이 뒤지는 액수이다. 휴대폰 천국의 자화상이라 해야 할까.

"병원에 오래 근무하셨으니까 얘깃거리가 적지 않을 것 같아요. 병원 구성원 간, 환자와 간호사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소박하지만 진한 감동을 수반한 얘기들...“

나는 그녀의 경험을 들추어낼 요량으로 말을 던졌다.

"습작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생각날 때마다 끄적거린 글들이 있긴 해요. 직장 퇴직 기념으로 수필집을 한 권 출판하고 싶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드러내기가 부끄럽기도 하구요. 책 제목까지 정해놓긴 했는데..."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끄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 그렇습니까? 기대가 됩니다. 글쓰기의 관건은 자신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시작이 반'이라며 자신감을 갖고 준비할 것을 권했다. 병실을 나가면서 요즘 글쓰기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읽고 있다고 했다. 모아 둔 글들을 수정ㆍ보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보다 나은 퇴직 기념 수필집을 위하여...

나에겐 책을 매개로 이어질 뻔한 인연이 몇 있다. 12.12 사태로 계엄령이 발동되고 휴교령으로 대학이 모두 문을 닫았다. 중간ㆍ기말 시험을 보지 못해 과제물로 성적을 매기던 때다.

학교 대신에 서울 시립도서관으로 가서 과제물을 준비해야 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학생은 식사를 하면서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읽고 있었다. 손에 익은 삼중당 문고판 책...

과제물에 치여 틈이 없을 텐데 외국 작가의 소설이라니! 대학생이 아닌가? 내게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커피를 두 잔 빼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문학을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그 여학생과 한동안 만남과 연락이 이어졌다. 그녀는 문학뿐 아니라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나의 대학 생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여학생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녹색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지나려 할 때 택시가 달려와 몸을 덮쳤다. 이 사고로 1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서울 S병원에 장기 입원을 해야 하는 환자였다. 오랜 병원 생활이 간호사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게 했다. 간호사들 중에 더 호감을 갖게 된 사람이 수간호사 B다. 나와 연배가 비슷할 뿐 아니라 책을 좋아했다.

틈나는 대로 독서를 하는 그 수간호사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처음 눈여겨봤을 때 이외수의 장편소설 <벽오금학도>(동문선)를 읽고 있었다. 기행 이외수는 나도 관심 두던 작가이다.

병상 생활과 문학에 대해 간간이 공동 관심사를 나누다가 퇴원했다. 퇴원을 하고도 몇 차례 만나긴 했지만 병원 바깥에서의 만남은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 환갑을 넘었을 지금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튿날 밤시간도 한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 날이어서 사람들은 이날을 더 알차게 즐기려고 애썼다. 병원 전체가 휴진이었다. 심지어 1층 24시 편의점까지 셔터를 내려놓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회진을 돌고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화장실을 가면서 간호사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젊은 간호사들은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런 중 수간호사는 예의 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들고 있는 책이 눈에 익은 것이었다. 옅은 하늘색 표지에 원고지와 펜 그림. 내가 쓴 글쓰기 책이 아닌가? <글, 누구나 잘 쓸 수 있다>(design나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무슨 책을 그렇게 재미있게 보세요? "

시치미를 뚝 떼고 물어보았다.

"제가 글쓰기 책을 구입해 읽고 있다고 했잖아요. 한 번 정독했는데, 쉽게 씌어져 좋으네요.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자신감을 갖게 하는 책인 것 같아요."

'이 책의 저자가 접니다'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저자가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독자를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 후배가 도서관에 사서로 근무하고 있거든요. 그 후배가 소개해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 수간호사에게 책 읽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다시 말해 주었다. 중환자가 발생했는지 간호사들이 갑자기 바쁘게 움직였다. 산소통을 단 기계가 급히 달려왔다. 소중한 한 생명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이틀 후에 퇴원을 했다. 책을 좋아하고 퇴직 기념으로 수필집을 내고 싶다는 수간호사는 밤 근무라 사무실에 없었다. 내 책을 사서 정독한 수간호사에게 저자 싸인본을 선물하고 싶었다.

책 표지 안쪽에 다음과 같은 서증을 붙였다. 그리고 근무하는 다른 간호사에게 좀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랑과 정성으로 환자를 돌보시는 안경희 수간호사님께 졸저를 드립니다. 따뜻한 인성이 책을 통해 차곡차곡 쌓인 결과이겠지요? 저자 이동호 드림“

그 며칠 뒤 안경희 수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자로부터 싸인본은 받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책 쓸 용기를 다시 다지게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퇴직 기념 수필집이 나오면 싸인을 해서 한 권 꼭 드리겠다고 약속했다(耳穆).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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