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며칠이 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생필품은 준비해야 한다. 아내는 자기도 환자인데 혼자 해야 하는 것이냐며 투덜댔다. 칫솔치약‧비누‧수건‧속옷‧슬리퍼‧컵‧책‧노트북...

이에 앞서 자동차보험에 사고를 접수하고 승락을 받아야 했다. 상대 보험회사의 접수번호까지 받아야 병원에 입원을 할 수 있다. 이런 일 처리를 카카오톡으로 하니까 편하기가 이를 데 없다.

전에는 일일이 서류를 작성하여 우편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보완해야 할 것이 있으면 전화로 설명해야 했으니 시간과 정력의 소진 비중이 무척 높았다.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짐을 현관에 모아두고 하나하나 체크를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선물 상자를 들고 막 마당으로 들어섰다. 가까이 지내는 K였다. 시의원을 지낸 후배였다. 추석 명절 잘 쇠시라며 경쾌한 인사말을 해왔다.

챙겨 둔 짐을 보더니 "차 밀리기 전에 고향을 가시는가 보네요?"라며 잘 생각하셨다는 투로 말을 건넸다. "고향이 아니라 병원에 갈 물품들이네." "예? 누가 입원하시나요? 형님 아님 형수님이?"

내가 지팡이를 짚고 어렵게 걸음 띄는 것을 보고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가 다 다쳤네. 어제 자동차 충돌 사고가 있었어. 택시를 부를 참이었는데, 잘 되었네. 병원까지 좀 태워주게"

어제 오후 2시경이었다. 시내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차 사고가 났다. 김천역을 지나 평화남산동 신한은행 앞 2차선을 서서히 가고 있는데, 흰색 벤츠 차가 1차선에서 우회전하려다가 내 자동차와 부딪혔다.

외제차 벤츠와의 충돌 사고로 많은 애를 끓여야 했다. 또 추석 명절을 거꾸로 쇠야 하는 운명과 맞닥뜨려야 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덜컥 겁부터 났다. 외제 차는 수리비가 장난이 아니란 말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들 말했다. 선글라스를 낀 젊은이가 벤츠에서 내리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아니, 1차선에서 우회전을 하는 차가 있으면 잠깐 멈춰줘야지 계속 가면 어떡하자는 거예요! 뽑은 지 6개월밖에 안 된 차인데, 수리비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차를 박은 거예요!"

그는 씩씩거리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나는 정신이 혼몽한 상태로 갑자기 차선을 변경해 2차선으로 뛰어든 작자를 보고 '방귀낀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아내도 사고 부위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젊은이가 차를 빼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좌우로 차량이 길게 밀려 있었다. 곳곳에서 크락션 소리가 진동을 했다. 양쪽이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으니 물증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셈이다.

벤츠 차량은 뒷 범퍼가 너덜댔고 내 차는 앞쪽 범퍼 왼쪽이 심하게 부숴져 있었다. 평일인데도 신한은행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자동차보험에 전화로 사고 접수를 했다. 직원의 친절한 안내는 혼몽스런 마음을 조금 눅어 뜨려주었다.

상대방 보험회사 직원이 먼저 도착했다. 냉정하게 생긴 중년 여성이었다.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연락처를 받아 적은 후 벤츠 차량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차주인 젊은이가 오른쪽 뒷바퀴 휠의 흔적을 닦아내면서 휜 것 같다고 말했다.

사고처리 매니저라고 명함에 적혀 있는 그 여성이 기겁을 하면서 말렸다. "사고가 났을 때는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중요해요. 흔적을 없애면 그만큼 불리해요.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젊은이가 하던 행동을 흠칫 멈추었다.

벤츠 보험회사 직원(사고처리 매니저)은 그 차주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내 차를 가해 차량, 그쪽 차를 피해 차량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충돌 흔적을 없애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서 그런 생각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내 차량 보험회사 직원이 도착했다.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이었다. 하지만 말은 공손하고 따뜻함이 묻어났다. 벤츠 보험회사 직원이 질문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을 묻고 서류에 속기했다. 그리고 대충의 사고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사고 현장으로 가서 설명하는 게 이해가 빠를 것 같은데요. 100m 거리이니 함께 가 봅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블랙박스 영상은 사고 해결의 기초가 된다.

"아니, 그럴 것 없습니다. 그건 아날로그 방식입니다. 사진을 찍어두셨다고 했지요? 아니, 그것보다 블랙박스를 열어보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블랙박스는 켜두셨겠지요?"

"어떡하죠? 꺼둔 상태인데... 블랙박스를 24시간 켜두면 전기 소모가 많아 방전이 쉽게 된다고 해서... 실제로 최근 연거푸 두 번이나 방전으로 시동이 안 걸려 A/S를 불렀었거든요."

직원은 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벤츠 차주에게 가서 블랙박스 유무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양해를 구한 뒤 바로 벤츠 조수석에 앉아 블랙박스 영상을 폰에 담았다. 그리고 상대 보험 직원에게도 보내 주었다.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단골로 정해 놓고 차량 수리하는 곳이 있습니까? 없으시면 덕곡동 무실삼거리 G자동차정비소로 가세요. 제가 소개했다고 하면 꼼꼼하게 잘 해 줄 거예요."

"저는 H정비 업체로 가고 싶은데... 그곳이 직영이니까 정확하게 해 주지 않나요? 사람들이 그곳을 많이 추천하던데, 잘 한다고..."

"아 예, 그러시면 거기로 가세요. 선택은 사장님 권한이니까요. 그런데 이걸 생각해 보셔야 할 거예요. 오늘이 25일(월) 오후 5시, 28일(목)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잖아요. 추석 연휴 때 차량을 쓰시려면 27일(수)엔 정비소에서 차가 나와야 할 텐데요. 아마 H정비소는 가능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G정비소로 전화를 넣는 것 같았다. "예, 예, 된다구요? 그러니까 추석 연휴 때 차랑을 쓸 수 있단 말이지요? 실수하면 안 됩니다. 손님들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이 정도인데 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하지만 벤츠 운전자는, 어쨌든 수리 기간 중 렌트를 해야 하니까 H정비소로 가겠다고 했다. 그곳에 친구가 근무한다고도 했다. 나는 그 직원이 소개한 G정비소로 가기로 내심 결정했다.

"아 참, 아까 이번 사고로 다치신 데는 없다고 하셨지요? 아프신 곳... "

나는 차량 손상과 외제 차 수리비 보상 문제에 신경 쓰느라 몸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내는 머리가 좀 아프다면서 이마에 계속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순간 충격으로 받은 지나가는 두통이라고 생각하고 '괜찮은 것 같아요'라며 개연성 말을 했다.

그날 밤, 지례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책 출간에 대해 은미에게 들었다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내일 시간되면 저녁식사나 하러 오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추석 전에 한 번 들려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선물도 하나 준비해 둔 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내의 두통은 그 강도가 더해졌고, 나도 허리가 결리고 다리 신경이 눌려 걷기가 표나게 힘들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아직 폐차하지 않고 있는 전에 타던 차 시동을 걸어보았다. ‘끼릭끼릭’을 수차례 반복하더니 다행히도 시동이 걸렸다.

굉음을 질러대는 고물 자동차는 지례까지 가는 데 딱 새 차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산 속에 자리잡은 삼실마을이 맑고 신선한 마을이어서 좋긴 한데 경사가 있어서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다니는 데엔 불편함이 따른다. 누나 집 대문 앞에 차를 대고 현관까지 가는 데도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자형이 내 몸을 부축하며, 이전 볼 때보다 몸이 더 안 좋은 것 같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안쓰러워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몸의 노쇠현상이 느껴지네요. 어제는 작은 차량 사고까지 있었습니다. 갑자기 걷기가 더 불편하고, 아내는 두통까지 밀어닥친 게 그 사고 때문인지 모르겠네요."

가까이 살면서도 도움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자형과 누나는 몹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늘 살갑게 대해 주어서 도리어 난 고맙게 여기고 있는 자형과 누나 부부이다.

"처남, 어제 차 사고 났다고? 차량 충돌 사고는 후유증이 따르는 법이요. 병원 가 봐. 시간을 놓치면 곤란하니까. 내일이라도 병원 가서 수속을 밟도록 해요. 가만 있자 J병원 원무과 후배에게 연락해 줄까?"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도 저지만 안사람 두통이 가라앉지 않으니 가보긴 가봐야겠어요. 오늘 오후부터는 호흡도 약간 거칠어진다고 하네요."

오랜만에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교통 사고 얘기로 시간을 채우는 게 좀 미안했다. 누나는 산채 중심으로 정성껏 상을 준비했다. 동생이 오는 데도 맨날 먹는 상이라며 미안해했지만 숨은 공력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상차림이었다.

평상시 상이라고는 했지만 차려진 산채정식에는 누나의 깃든 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밥맛이 일미였다. 밥알에 찰기가 넘쳤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먹기 위해서 직접 지은 친환경 쌀이라고했다. 찬 없이 밥만 먹어도 잘 넘어갈 것 같다고 했더니, 자형은 그러잖아도 처남 몫 한 가마 준비해 놓았다고 했다.

보통 때보다 일찍 자리를 떴다. 가끔 들릴 땐 밤 10시가 넘었지만 시침이 8시를 가리킬 때 대문을 나섰으니까. 자형은 쌀을 힘겹게 내 차 트렁크로 옮겨 주었다. 누나는 보기는 매끈하지 않아도 맛은 좋다며 가지 고추 양파를 한 포대씩 차에 실어 주었다.

그날 밤에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가라앉는 기미가 보였다면 병원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형이 교통사고 후유증을 언급할 때도, 사실 갈 마음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밤새 신음 소리의 회수가 잦아졌다. 병원 갈 마음이 굳어졌다.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병원 행 차비를 서둘렀다.

준비물을 챙기고 병원 갈 차편을 궁리할 즈음 가까이 지내는 K가 추석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병원까지 태워달라는 부탁을 어렵게 하게 된 연유가 이러했다. 연휴 직전이어선지 병원 주차장은 만차였다. 다행히 빠지는 차 한 대가 있어 그 곳에 차를 세웠다.

서울에서 아이들이 또 부산과 거창에서 형님과 조카들로부터 연이어 폰 벨이 울렸다. 여러 곳에 전달하려고 준비한 샤인머스켓이 번짓수를 잃고 널부러져 있는 모습도 안타까웠다. 큰형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몸이 먼저다. 안 와도 된다’며 혀를 찼다.

K는 짐을 병원 로비까지 운반하고 수속까지 밟아주려고 했다. 그럴 것까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가 다음 들를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서 가 보라고 했다. 친동생과 같은 후배가 같은 지역에 산다는 것이 든든하다.

"추석 인사차 들렸는데, 그 어느 때보다 제가 잘 온 것 같으네요. 형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왔으니까요. '추석 명절 잘 쇠시기 바랍니다'란 인사말을 했는데... 추석을 거꾸로 쇠시게 되었으니... 열심히 달려오셨잖아요. 긴 추석 연휴 무념(無念)으로 푹 쉬십시오."(耳穆)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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