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교가 깊은 분은 아니었다. 그는 가야금 명인이고 나는 그의 연주를 듣는 청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늘 큰 산으로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황 선생이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부음을 접했다.

내가 그를 좋아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세류에 휩쓸려 산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거스르되 모가 나지 않았고, 예술적 자유를 만끽하되 흐트러지지 않았다. 학처럼 고고했지만 주위에 늘 따뜻하게 다가갔다.

이것 하나만 봐도 그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면서도 법전에 매달리지 않았다. 예술적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 가야금에 매료되어 진로를 바꾸었다. 6.25전쟁이 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음대 대학원 국악과에 진학했다.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괘도 수정이다. 집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서도 그를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가야금이 좋은 게 유일한 이유였다. 서울대 음대에 국악과가 처음 개설되었다. 그는 1회로 입학해서 졸업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법대 출신 황병기는 가야금이 좋아서 그것과 벗하며 일생을 보냈다. 법을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어 있을 때에도 그는 가야금 줄만 뜯고 있었다. 거기서 황홀함을 느꼈다.

1990년대 초로 기억된다. 아내와 함께 예고 없이 P 변호사 댁을 방문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국립극장을 향했다. P 변호사는 황병기 선생의 대학 후배다. 마침 초대권 4매가 왔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다. 황병기 가야금 독주회였다.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연주하는 모습(Right Now Music 사진)

17현가야금과 서양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춘설(春雪)'이라고 했다. 나는 가야금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의 연주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눈 오는 이른 봄 마을 정경을 다양한 음률로 들려주는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참 뒤에 그가 쓴 수필 형식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수록 잡지 이름은 잊었지만 글의 제목은 '가야금의 비망록(伽倻琴의 備忘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가야금을 배우게 된 동기와 그 후의 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농축된 자서전 성격의 글이었다.

황 선생의 삶은 부요(富饒)했다. 정신적으로 한없이… . 그의 이름은 영국 현대음악가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독일의 MGG 음악 사전에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음악 평론가 윤중강은 황 선생의 음악 세계를 이렇게 정리해 준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마치 나선형과 같은 두 가지 인력이 작용한다. 하나는 중심으로 향하는 힘(傳統)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서 벗어나려는 힘(未來)이다. 이러한 두 가지 힘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그는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는데 이들을 '한국적 낭만주의 음악'이라 하겠다"(윤중강, 「가야금은 계속된다」, 새롬, 152).

그는 오랫동안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황병기 선생은 예술을 모르는 사람은 지성인 축에 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권력에 약하고 재테크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을 마뜩잖게 여겼다. 사회가 진화할수록 이런 사람들이 들끓어 마음 편치않게 여겼다.

2018년 1월 마지막 날, 황 선생이 세상을 떴다. 팔순을 넘긴 연치(年齒)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노인 분들에게 폐렴은 무서운 병이다. 합병증을 몰고 와 생명까지 앗아간다. 황병기 선생의 천국 안식을 빈다. 그의 '침향무(沈香舞)'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발행인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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