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어디쯤이에요?"

"대전 다 와 가. 9시 30분 도착으로 나오는데?"

호형호제(呼兄呼弟)란 사자성어는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이다. 서울에서 김천까지의 거리는 6백 리가 넘는다. 이 먼 길을 4명의 형제가 달려오고 있다.

기도하며 별을 보고, 시원한 공기 마시며 찬송하고... 10대 소녀처럼 박 사모는 사택 옥상에 기도처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도처를 놓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손 집사님을 통해 응답을 주셨다. 옥상에 튼튼한 텐트로 기도실을 만들어주신 것이다. 비나 눈이 와도 또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끄떡없는 기도실...

"이 목사, 서울 후배들 몇 시에 도착하지?"

"예, 9시 30분쯤 도착합니다. 형님은 점심시간 맞춰 정오쯤 오시면 됩니다."

상주에서 김상현 선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난 주 만났을 때 이런 방문 행차를 전하면서 시간 되면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말씀드렸었다.

그 얘기를 잊지 않고 전화를 준 것이다. 김상현 선배와 형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자체만으로 큰 힘이 된다. 상주 생활도 한 달 반 남짓 남았다.

"이 목사, 오늘 작업 못하겠는데... 주문한 텐트 부속이 몽땅 빠졌고 천정 덮음막은 두 개나 왔네. 또 문 쪽 막도 오지 않았고... 이 사람들 장사를 이렇게 하지!"

차질이 생겼다. 주문자와 물건 받는 자가 다를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텐트 판매처로 전화를 넣었지만 광복절 공휴일이어서 받지를 않았다.

다른 일로 급히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부터 옥상 태양열 호스 물이 샜다. 간단한 것 같지만 인문학도인 내게 그 일은 높은 산과 같았다.

급히 철물점에 가서 자재를 구입했다. "목사님은 차에 가만히 앉아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엑셀, 이음나사, 호스를 에워쌀 원통형스티로폼...

"연결을 단단히 했으니까 물은 새지 않을 거야. 스티로폼 작업은 점심 먹고 하지 뭐. 시간이 갑자기 널널해졌으니까."

그 사이 김상현 선배님과 형수님이 도착했다. 우리는 기도를 하고 예배당에서 방문 기념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복국으로 정했다.

김상현 선배가 김천 우리 교회 처음 방문한 날, 예배를 마치고 이 복국집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앞으로 이런 음식보다는 짜장면이나 우동 같은 것으로 하면 좋겠다고 했다.

복국이 식성이 맞지 않아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대접하는 후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12시 30분으로 예약을 해 놓았으니 12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김상현 선배와 형수님은 내 차를 타고, 편남영 김용철 두 장로님과 손영강 집사님은 서정욱 집사님 차를 탔다.

햇볕이 장난이 아니었다. 폭염주의보에 대한 경계 문자가 연달아 들어왔다. 점심식사 후 부항댐 관광을 가기로 했지만 급히 수정해야만 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에 의해서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야외 나들이는 위험해요. 어제 우리 병원에 온열병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왜인지 알어? 35도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다가 쓰러졌대. 80대 할아버지가."

식사를 하면서 김상현 선배의 경험담을 전하면서 야외 나들이보다는 시원한 커피숍 같은 데 가서 정담의 시간을 갖자고 했다. 모두들 이의 없이 변경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복국집은 오늘따라 서비스가 더 좋은 것 같았다. 서울에서 오신 손님들이라고 소개한 것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식사 중 나온 만두는 서비스라고 했다.

보통 후식으로 하나가 나오는데 오렌지와 오미자차 두 개가 나왔다. 손님 대접을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데, 김상현 선배가 계산했다. 가난한 후배 사랑의 발로이다.

소년 소녀의 마음이 잔존해 있는 두 분이다. 세상 때가 짙게 묻은 사람들에겐 무척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의 대화가 오고 갔다. 형수님이 형님에게 말을 건넨다.

"여보, 화장실 안 가요?"

"으응...? 가야지."

일어서는 김상현 선배를 제지하며 나는 아내에게 지갑을 전달했다. 먼저 가서 계산을 하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 형님이 하는 말이 있다.

"이래 봬도 나 월급 타는 사람이야! 끈 떨어지면 사 주고 싶어도 못 사요. 형편 될 때 대접하고 싶으니 말리지 마."

지방 종합병원 계약 기간이 끝나 간다. 1년 만이라도 더 근무해 달라는 강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이다. 그 할 일이 도대체 뭘까?

경기도 양평에 있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성도를 가진 작은 교회, 사례비도 없고 활동비도 나오지 않는 작디작은 교회에 목회를 하러 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조용한 찻집으로 옮겨 정담을 나누기로 했지만 막상 갈 곳을 정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겨우 떠올린 곳이 '전통찻집 자명'이다. 안 간 지 1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같은 김천인데도 8km 거리로 나왔다. 내가 앞서고 뒷차를 따라오라고 했다. 혹시 쉬는 날은 아니겠지? 만약 쉬는 날이면 직지사 입구에 있는 카페 '다반향초'로 가기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명 주차장엔 차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다행히 빈 테이블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 두 개를 빌려와 즉석에서 8인용 자리를 만들었다.

찻집에 왔으니 차(茶) 이야기, 건강 이야기, 여행 이야기...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고교 학창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매번 듣는 얘기인데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는 것!

중동기독신우회를 끈으로 만난 인연임을 알고 참석자 중 유일하게 중동 출신이 아닌 손영광 집사가 중동 출신 중 크리스천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120년 전통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문 목회자 소식, 장로님ㆍ 집사님들의 신앙과 사업 이야기, 이단들의 발생과 대처 방법 등... 백과전서파 식의 나열된 얘기들을 구슬처럼 꿰기에 바쁜 모습들이었다.

모처럼의 원행(遠行)이어서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양열 호스 관인 엑셀을 스티로폼으로 두르는 작업까지 마쳤다. 이젠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 사이 아내는 손님들에게 안길 선물 준비에 분주했다. 농촌 마을에서 준비할 선물이 무엇이겠는가. 신토불이(身土不二) 농산물밖에 없다.

풋고추ㆍ가지ㆍ오이ㆍ감자 등 우리 텃밭은 무농약 자연스런 성장을 지향하는 것들이어서 비록 못나 보이지만 친환경 농산물이다. 함부로 발설해서는 아니 될 내용이다.

거기에 최근 출판된 나의 저서 <글, 누구나 잘 쓸 수 있다>(디자인 나무)를 저자 서증을 덧붙여 선물했다. 방문한다는 전언에 미리 준비해 두었었다. 모두 5권.

"이런 책은 사서 봐야지 그냥 받으면 안 돼요."

"아니에요. 선물하고 싶어서 미리 준비해 둔 거야. 6백여 리를 달려온 것만 해도 이미 값은 충분히 치른 거예요."

헤어지면서 편 장로님은 책값이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막무가내였다. 잠복 되어 있는 출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이었다.

부속 불착으로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은 뒤로 미뤄야 했다. 다시 방문하라는 사인(sign)으로 모두가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목적, 선후배의 사랑 나눔은 깊이와 넓이를 더했다.

손영강 집사가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수원 가서 제가 쏘겠습니다. 소갈비탕으로요." 서정욱 집사와 김용철 장로가 동시에 맞장구쳤다. "그것 좋지요."

수원 가면 저녁 7시쯤 될 것 같다고 했다. 모퉁이를 꺾은 차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하하호호 주고받는 웃음소리가 한참 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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