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역사의 진보를 가르쳐주신 강만길 선생님!

발행인 이명재(Ph. D)

이웃교회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의 부고를 접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젊은 시절 역사에 눈을 뜨게 하신 분이 바로 강만길 선생이었다. 내가 역사를 전공한 동인도 제공했다.

강 교수님을 비롯해 몇몇 분은 역사뿐 아니라 나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기만이 아닌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삶인지 그분들을 통해서 깨우치게 되었다. 우리에게 좋은 멘토였다.

내가 역사에 새로운 시각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만난 분이 강 교수님을 비롯한 진보적 사학자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통이라는 이름의 강단사학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안(歷史眼)은 무척 신선했고 매력적이었다.

대표적인 책이 강만길 선생이 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창작과비평사)이다. 1970년대 말에 출판된 책이다. 선생은 이 책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그 힘이 남북통일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보장되는 세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중이란 개념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 단어로 역사를 이야기했고, 남북 분단이 당연시되고 공고화될 때 통일의 시대가 도래해야 함을 학교 안팎에서 강의로 또 글로 사람들을 일깨웠다. 그의 이론은 울림이 컸다.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강만길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혜안이 사람을 통해 역사적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둠의 시대에 진정으로 지성인의 자리를 지킨 분이다.

진보 역사학자로서 실천적 삶을 살아온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6월 23일 별세했다(사진=연합뉴스)

강 선생의 새로운 역사 해석은 사람을 가까이 이어주었다. 또 가끔은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분으로 인해 무언가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동질감이 형성되었지만 그 반대의 사람들은 멀어지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적 국사 지식에 결박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강 선생의 역사 이론이 위험천만하게 다가갔을 테니 자연 멀어지게 되었다. 강 교수님은 지식인이 역사의 어느 지점에 서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명확하게 설파했다.

강 선생의 역사 해석 중 아직도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에 대해서이다. 훈민정음 서문에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 이를 불쌍하게 여겨 한글을 창제한다"고 되어 있다.

1988년 통일문제 금요강좌에 나와 강의하는 강만길 교수

우리는 세종대왕의 이런 애민사상을 칭송하며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강만길 선생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사료에 근거한 해석이니만큼 주류 사학이 무시만 할 수도 없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양반의 선을 지키기 위한 보호장치였다. 한자는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는 중요한 선(線)이었다. 상민이 양반의 고유 문자인 한자를 익혀 선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뚝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상민들에게 익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양반의 성채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이 짙게 깔리어 조선조 말 심지어 일제시대까지 한문을 진서(眞書), 한글을 언문(諺文)이라고 했다. 양반의 체통을 지켜주는 게 한자였다.

강만길 교수가 1978년 출판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과 그의 자서전 격인 <역사가의 시간>은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되었다.

이런 해석은 왕조사관에 젖어 있는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역사 해석이다.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해석이다. 이런 진보 사학의 중심에 강만길 선생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강 선생는 상아탑의 책상에만 앉아 있지 않았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었다. 유신 시절부터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실천적 길을 걸으면서 민족 정체성 회복과 남북통일에 대한 활동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제2기 통일고문회의 고문으로 활동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밖에 학원의 자율과 민주적 운영을 위해 상지대 총장으로서 직임을 감당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강 선생을 불렀고 그에게 의지했다.

한 강좌에 나와 통일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사진=오마이뉴스)

강만길 선생은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우여곡절과 시행착오의 과정이 없지 않지만 멀리 볼 때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관철되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하는 젊은 학도들에게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을 설립해 돕기도 했다.

지금의 시대 상황이 녹록지 않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는 탄식의 소리가 이서제서 들린다. 하지만 강 선생은 희망의 끈을 놓지 말 것을 당부한다. "역사는 인류 사회와 인간이 추구해마지 않는 이상을 현실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이제 책을 통해서만 교수님을 만날 수 있다. 시간 나는 대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찾아 읽어야겠다. 젊은 시절 맥박을 뛰게 만든 그 책이다. <역사가의 시간>도 다시 정독해야겠다. 치열하게 실천적 삶을 살다 가신 노 사학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책이다.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뒤 인천공항으로 도착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2005년 6월 17일).

별들이 하나둘 떨어질 때마다 다짐의 시간을 갖게 된다. 역사라는 긴 여정을 생각하며 나는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늘로 가신 그분을 떠올리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선생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한다.

발행인 gcilbonew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