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6월 10일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나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날이다. 이날은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기념일이기도 하지만, 1987년에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87체제’를 가져온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87체제’란 1987년에 제정된 현행 헌법에 의해 규정된 민주체제를 의미한다.

민주화운동사에서 갖는 의미가 워낙 크기 때문인지, 6.10독립운동과 관련된 오늘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느낌이다. 조선왕조 최후의 황제 순종(純宗)의 인산일(장례일). 망국의 설움에 북바친 조선인들은 마지막 가는 황제의 귀천(歸天)길을 눈물어린 만세소리로 그 슬픔을 대신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일제 통치에 항거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이었지만, 근년에 와서 독립운동으로서의 의미는 시들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같은 날 기념되어야 할 ‘6.10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더 부각되는 것도 아니다.

11시부터 김대중학술원 ‘격월연구회의’에 참석했다. 그 때문에 10시부터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열린 행정안전부 주최의 ‘제36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뒤에 확인된 것이지만, 이 기념식의 초청자요 주최자인 정부가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참석하지 않았다. 그 책임이 어디에 있든 모양은 좋지 않았고, 정부의 주장대로 그 책임을 시민단체에 물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정부의 옹졸함이 면피되는 것이 아니다. 식자들은 최근 정부가 노동․시민 단체를 길들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옹졸함의 선상에서 이를 이해하고 있다.

김대중학술원 격월연구회의

김대중학술원 ‘격월연구회의’는 백학순 원장의 ‘햇볕 정책 : 한반도 평화․통일․번영의 대전략’이라는 발표와 토론, 점심식사 등 오후 2시까지 계속했다. 발표에 대한 지정토론자 두 분을 포함, 20명 남짓한 회원이 모두 오늘 주제와 관련된 발언을 했다. 발표자는 ‘햇볕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과 진전과정 및 그 효과까지도 짚어가면서 설명했다. 토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 해결과 관련, 민족적 이상과 국제적 현실을 조화시키면서 취했던 ‘리얼리즘’을 부각시켰다. 의제는 ‘전작권 문제’와 ‘중립화론’에까지 확대되었다.

오후 2시 연구회의를 마친 후에 그동안 뵙지 못한 서울대의 김병로 교수를 원광대의 최재덕 교수와 함께 만나 담소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북한 안의 문제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몇 안 되는 북한전문가다. 그는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선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유물과도 같은 불합리한 제도들을 개혁하려고 노력한 사례들을 예시하면서 알아듣게 설명해 주었다. 무소불능의 권한을 갖고 있는 그 젊은 지도자도 때로는 한계에 부딪친다고 했는데, 요 몇 년 사이에 개혁된 제도가 구체제로 다시 돌아간 것도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에는 남북한이 공조할 수 있는 많은 여지가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제3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서 한 참석자가 분향하고 있다.

오늘 오후 2시 30분부터는 서울시청 동편 도로(구 국가인권위원회 앞 도로)에서 ‘제3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있었다. 그곳을 향해 가다가 오늘도 서울시청 앞에 조성해 놓은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분향 묵도했다. 벌써 몇 번째다. 10.29 참사와 관련, 용산구청장은 공황장애를 구실로 석방되어 나왔다.

서울시경국장이나 경찰청장, 관계 장관,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어 합동분향소를 지날 때마다 마치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관계 장관이란 분은, 내가 왜 그 책임을 져야 하느냐면서 자신에 대한 탄핵을 헌재에 넘겨 판단을 구하고 있는 중이지만, 국민들은 그 뻔뻔한 장관에게 그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도대체 어떤 책임을 지겠느냐고 묻고 있다. 그만이 그걸 모를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전면에는 추모의 대상인 수백 명 희생자들의 영정이 나열되어 있다. 1990년 6월 10일 성균관대에서 국민연합 주최로 이 추모제를 개최한 이래 오늘이 32회째가 된다. 주최 측이 마련한 안내 책자에는 1959년의 조봉암으로부터 시작하여 김주열 조용수 등 제씨로부터 시작, 각 시기의 열사와 희생자를 시기별로 정리해 놓았다.

제36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리는 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나 기념식을 주최해야 할 정부에서 불참, 참석자들의 원성을 샀다.

끝에는 ‘진상규명되지 않은 사법 사형자 옥중희생자 장기수 116명’이 첨부되어 있다. 대부분이 나와 동시대의 분들이어서 숙연함과 동시에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평소 알고 있던 분들의 영정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최근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산자들이 앞서간 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며, 역사 앞에서 해원(解寃)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 마지막 순례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 오후 6시 반부터 시작하는 촛불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매주 촛불행동 동지들이 행사 시작 전에 먼저 모이는 ‘할리스 커피’ 집으로 갔다. 김영 교수께서 먼저 와서 피곤을 풀고 있었다. 김 교수는 동지인 이명재 님의 부친 이강복 선생님의 영정을 안고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의 영정행진에 같이 참여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기다리니 평소에 회집하던 동지들-이명재 조성민 박충구 서은숙 김인경-께서 나오셨고, 오늘은 특별히 백승종 교수께서 평택에서 먼 길 오셔서 힘을 보탰다.

평소에도 그랬듯이, 동지들은 날더러 노인 대접하느라 일찍 귀가하라고 한다. 못이긴 체 촛불행사가 시작도 하기 전에 귀갓길에 올랐다. 이명재 선생께서 지하철역까지 안내해 주셨다. 내 이른 퇴장으로 뵙지 못한 이들은 다음 주에 더 반갑게 만나게 될 것이다.

편집부  gcilbonews@daum.net

편집부  gcilbonews@daum.net

<저작권자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