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잡은 가족 여행

연말에 외국 여행 일정을 잡은 것은 가족 여행인 이유가 컸다. 부부에 자녀 셋, 함께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두 사정이 닿는 때를 잡아야 했다. 직장을 다니는 세 아이에게 참석할 수 있는 기회는 연말밖에 없었던 터다.

엄마 아빤 가만 계시라며 아이들이 가족 단톡방을 통해 각자 분담한 준비물들과 진전 상황을 주고받았다. 공동 준비물, 비행기 티켓, 일본 오사카와 교토의 숙소 및 음식점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올렸다.

인천국제공항엔 새벽 5시에 도착했다. 7시 25분 발 간사이공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항공사에서 수속을 밟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해 늦어도 2시간 30분 전에 공항에 도착할 것을 몇 번이나 문자로 알려왔다.

간사이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9시 15분이었다. 입국 수속을 밟는 데에도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코로나19가 수속을 더 더디게 만들었다. pcr검사 음성 확인서를 보여주고 체온을 재고, 방문 목적, 일자와 호텔 연락처 등을 구체적으로 쓴 다음 로비로 나올 수 있었다.

S선교사가 로비에서 손짓을 했다. SNS를 통해서 서로 얼굴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그는 준비해 온 환영 피켓을 흔들어댔다.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갔다. 9인승 승합차였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될 거라고 했다. 모처럼의 외국 여행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설렘이 적지 않은 듯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일본어 기초를 공부하고 온 터라 떠듬떠듬 간판들을 읽어 내려갔다.

연말이 바쁘기는 S선교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전혀 덜 하지는 않았다. 몇 가지 행사가 연말에 겹치는 바람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내가 몸이 불편하다는 얘기를 듣고 틈새를 이용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가이드 S 선교사.... 약자 사랑이 몸에 밴 사람

그의 약자 사랑에 고마움이 일었다.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그가 약자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된 데에는 무슨 연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문제는 직설적으로 물어보기가 좀 그렇다. 우회적으로 묻되 답변을 유도해 낼 수 있는 질문이어야 했다.

"선교사님, 시간을 내기 어려워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사 일정을 조정하셨나 봐요?"

그는 앞을 주시하며 묵묵히 운전에 전념하다가 얼마가 흐른 뒤, 붉은 신호에 걸리자 대답을 내놓았다.

"아닙니다. 행사는 그대로 진행 중이에요. 제가 맡은 부분을 급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장애인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해도 이 목사님이 이동하시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얼굴에 갑자기 우수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그의 입을 주시했다.

"목사님이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듣고 꼭 모셔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시각 장애를 갖고 평생을 사시다가 가셨거든요. 장애인의 친구가 돼라는 말씀을 늘 하셨어요."

오늘날의 S선교사가 있기까지는 8할이 부모님의 영향이라고 했다. 어릴 땐 장애인인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지나고 보면 철분이 자석에 끌려가듯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곤 했다고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언어 순화가 되어 장님 또는 시각장애인이라 하지만 제가 어릴 때는 봉사라고 많이 불렀습니다. 저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봉사 아들이라고 불렸지요. 그게 그렇게도 듣기 싫었습니다."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이었다면 어머니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고생이 많으셨겠지요?... 건강하셨습니까?"

나의 질문 취지가 뭔지 눈치챈 듯 S선교사는 피하지 않고 답을 했다.

"예, 어머니는 비장애인이셨구요. 참으로 얼굴이 예쁘셨어요. 마음은 그보다 더 아름다우셨구요. 주위에서 어머니를 천사라고 부르셨어요. 숨은 이야기는 슬픔이 가득한 인고의 내용이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과연 그 숨은 이야기가 뭘까? 동승한 아이들도 눈은 바깥을 보고 있지만 귀는 선교사의 말에 연결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S선교사의 숨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 *

점쟁이가 되기 위해서 신내림을 간구한 철수.... 그러나 교회의 새벽종 소리가!

철수와 영애는 한마을에 살았습니다. 영애는 그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 딸이고, 철수는 가장 빈한한 집 아들이었습니다. 영애는 철수보다 세 살 아래였습니다.

마을에 일찍 교회가 들어서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영애는 유교 집안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철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각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점쟁이가 되려고 골방에 틀어박혀 밤낮 빌기를 반복했습니다. 강신(신내림)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요. 어느 한 날 새벽, 신을 내려 달라고 가슴을 치며 빌고 있는데, 교회의 새벽종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철수는 허겁지겁 신발을 신고 종소리를 따라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신기한 것은 새벽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그날만 울린 것이 아니었을 텐데, 그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거예요. 철수는 그날 새벽 난생처음 교회에 스스로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교회 나오기 시작한 시각장애인이 고맙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 영애가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의 보호자를 자임한 것이지요. 이런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3년쯤 되는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손을 잡고 안내하는 영애에게 철수가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철수가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떠듬떠듬 말했습니다. 자기와 결혼해 줄 수 없겠느냐고.

장님인 철수, 천사 영애에게 청혼하다

청혼입니다. 영애는 그게 무슨 소리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쌍해서 안내를 자임한 것 뿐인데... 소리 소리 지르고 바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애는 다음 주일 혼자 예배당엘 갔습니다. 십중팔구 철수가 예배에 안 나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들어서는 순간, 철수의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앞자리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영애는 못 본 척 외면하며 반년가량 혼자 교회에 다녔습니다.

철수는 변함없이 예배에 나왔습니다. 믿음이 나날이 성장했습니다. 찬송 소리가 우렁찼고 기도 소리가 뜨거웠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던 중, 철수가 작대기에 의지해 어렵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영애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서 철수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았습니다. 다시 앞 못 보는 철수의 안내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추운 날씨임에도 서로의 손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로부터 또 2년 동안 함께 예배당을 오갔습니다. 예배당 갈 때 영애가 보호자 겸 안내인 역할을 다시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초기 믿음의 열정이 되살아났습니다. 걸으면서 힘들면 길가에 앉아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성경 구절을 물어오면 기쁜 마음으로 답하며 하하호호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런 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영애는 신앙 외의 대화를 가급적 피하려고 했습니다. 엉뚱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영애의 예쁜 마음을 칭찬했습니다. 약자를 돕는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칭찬이 더 자자했습니다.

다시 철수의 안내자 겸 보호자가 된 영애

해가 바뀌고 어느새 봄이 왔습니다. 혹한을 이기고 돋아나는 새싹들을 보면서 자연의 신비함에 감탄합니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아름다움을 말하려다가 영애는 움찔하며 멈췄습니다. 철수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깜박했습니다. 다음 주일을 약속하며 철수의 집 대문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이날 예배는 더 은혜로웠습니다. 찬송과 기도 소리에서 오는 마음의 울림이 컸습니다. 더욱이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서 사도 바울도 육체에 가시를 가진 장애인이었고, 이것을 바울 자신은 교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싸인(sign)으로 받아들였다는 대목이 영애의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둘은 손을 잡고 예배당을 나섰습니다. 교회 사모님이 우리 교회 천사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사탕 봉지를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 좋은 말이 천사입니다. 길 가 정자에 앉아 사탕을 나눠 먹을 일을 생각하니 기분이 날아갈 듯합니다.

정자엔 '洗心亭(세심정)'이라는 판액이 걸려 있습니다. 마음을 씻어주는 집? 세상 때에 찌든 마음을 씻겨주는 집이라면 자주 들려야 되겠다며 서로 크게 웃었습니다. 갑자기 마태복음 5장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습니다. 영애도 나이가 훌쩍 지나 스물두 살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고등학교를 나온 것만으로도 시골에서는 재원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에다 부잣집 장녀요 마음씨 착한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아들 가진 집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 일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철수의 믿음 생활을 돕는 것도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왠지 외로움을 안겨주는 계절입니다. 떨어지는 낙엽 때문일까요?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섰습니다.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것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두 사람은 오랜만에 세심정에 앉았습니다. 철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정강이에 상처가 났습니다. 쉴 겸 흐르는 피를 닦을 겸 해서 정자까지 온 것입니다. 영애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어 정성껏 핏자국을 닦았습니다. 철수는 아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철수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두 번 다시 결혼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 철수에겐 까마득한 옛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철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습니다.

영애와의 결혼을 두고 2년간 작정 기도한 철수...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

영애와의 결혼을 두고 2년 동안 기도해 왔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딱 2년 되는 날인데,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영애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흔들림은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철수에게 상처를 덜 주며 거절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했습니다. 이성적 냉정함이 요구되었습니다. 영애는 세 살 위인 철수에게 지금까지 오빠란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오빠라고 부르면서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두 번 다시 결혼하잔 말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오빠를 신앙의 동지로 생각하고 도운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는 것 오빠도 잘 알지 않어? 오빠와의 결혼을 우리 집에서 허락할 것 같아? 오빠가 우리 집 식구들을 설득할 자신 있어?

맨 뒤의 말, 집 식구 설득 운운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철수는 영애네 집사람들을 설득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열매 없는 호언장담이라는 것을 영애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영애는 두 번 다시 손잡고 예배당 가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50여 m쯤 걸어갔을까요. 갑자기 앞이 깜깜해지더니 하늘에서 청천벽력 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세상 삶은 잠깐이요 천국 삶은 영생인데, 너는 어찌하여 이 세상에 그토록 집착하느냐?'

"너는 어찌하여 세상에 그렇게 집착하느냐?"

철수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세상 가치에 집착한 결과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슬픔의 눈물인지 원통함의 눈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회개의 눈물이지 싶습니다.

영애는 철수에게로 가서 끌어 앉고 얼굴을 비볐습니다. 그가 나의 남자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믿음 약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아프게 해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철수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습니다.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빠하고 결혼할게.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 잘 알지? 가장 높은 산이 우리 가족들 승낙받는 일이야. 아까 오빠가 가족 설득해 낼 자신 있다고 했지? 그럼 됐어!'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었습니다.

며칠 뒤 철수가 영애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마침 부모님들이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신앙 차원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딸이 가난한 집 아들 그것도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고 교회에 들락거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왔습니다. 왜 왔느냐는 식으로 아버지는 뻘쭘하게 대했습니다. 철수의 손에는 계란 한 꾸러미가 들려 있었습니다.

영애네 집 식구들 중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열외가 되어 이러쿵저러쿵 소리가 없지만 초창기만 해도 핍박이 심했습니다. 가문 있는 유교 집안에 망조가 들었다는 둥, 서양 귀신에 홀리면 애비에미도 몰라본다는 둥... 심지어 호적에서 파내겠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철수의 청혼을 받아들인 영애, 그러나 가족들의 극렬한 반대

영애 아버지는 철수의 인사도 받지 않고 에헴! 헛기침을 하고는 어딘가로 나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애먼 부엌을 왔다갔다하다가 대청마루로 올라갔습니다. 영애도 철수의 손을 잡고 어머니 뒤를 따랐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면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거르는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먼저 운을 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철수와 결혼하겠다고 말하니 귀가 약한 어머니는 철수가 다른 처녀와 결혼한다는 말로 알고 건성으로 축하할 일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영애는 큰 소리로 ‘철수 오빠와 내가 결혼하기로 했다구요’라고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뭐라구? 시방 네가 철수와 결혼한다고 했냐? 그런 소리 하들 마라. 당치 않는 말은 하는 게 아니여! 난 모르겠다. 너 아버지께 물어봐라. 말을 마치고 아버지를 찾아오겠다며 휑하니 대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지나고 노부부가 돌아왔습니다. 결혼 얘기를 들었는지 아버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며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결혼 승낙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철수는 '하나님이 이미 승낙하신 결혼입니다. 아버님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경색되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철수는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며 자리를 떴습니다.

부잣집 딸 영애가 가난뱅이 시각장애인과 결혼한다는 소문은 금세 온 마을에 퍼졌습니다. 마을을 넘어 읍에까지 이야깃거리가 되어 나돌았습니다. '허, 용수막 최부자댁 딸이 심 봉사와 결혼한다며?' 모두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입방아를 찧어댔습니다. 결혼을 이해하는 사람은 교회 목사님 부부 정도였습니다.

최부자 집 장녀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결혼식

영애는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하나님 사랑을 더 크게 생각하는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영애는 결혼식 날짜를 잡았습니다. 5월 25일(토) 오전 11시, 장소 용수막교회. 주례 이성령 목사. 결혼식을 한 달 앞으로 잡은 것은 그새 무슨 변수가 돌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심한 것은 변함없이 밀어붙이는 영애였습니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굽힘이 없었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상의할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가끔 교회 목사님 내외를 찾아 도움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결혼식 날입니다. 최부자 집 장녀 결혼식치고 너무 초라합니다. 영애 아버지가 그동안 경조사에 들인 공을 생각할 때 축하객이 많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이어서 축하객으로 참석하기가 주저됩니다. 식장에 최부자 가족은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 사는 영애의 이모가 소식을 듣고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교회 권사님이라고 했습니다.

신랑 철수 쪽의 손님 몇 사람이 보였습니다. 작은아버지 부부와 고모가 참석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조카가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것에 불안해하면서도 또 한편 안도하는 얼굴빛이었습니다. 철수가 다닌 맹아학교 선생님도 참석했습니다. 축사 순서를 맡았습니다. 결혼식이 너무 썰렁해 참석한 이들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 * * * *

아름다운 열매, 믿음의 가정을 일구고....

S선교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가성비 낮은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야기 중 철수가 저의 아버님이시구요, 영애는 제 어머님이십니다. 아버지는 뒤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님이 되셨고 어머니는 오랜 기간 요양보호사로 일하시다가 지금은 요양보호사 양성학원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저와 제 밑 남동생이 목회를 하고 있구요, 여동생은 권사로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그 누구보다 더 존경합니다. 목사님, 푹 쉬십시오, 내일은 가가와(賀川)기념관 방문 일정이 잡혀있지요? 아침 9시에 뵙겠습니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짐을 운반해 주고 갔다. S선교사는 친절이 몸에 배어 있었다. 특히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성경 말씀의 기반 위에 시각장

작가 이명재(2013년 백두산 천지

애인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면이 큰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부모님을 존경한다는 말은 부모님뿐 아니라 S선교사의 삶이 녹아있는 문장이지 싶다. 이것을 두 어절로 줄이면 '참사랑의 열매'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 그 열매,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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