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 아닌 나에게는... 늙는다는 것과 기억력 감퇴는 비례하는 것인가. 오늘 희한한 일을 당했다. 아내가 어린이집 봉사를 나가는 날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번거로울 뿐 아니라 시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내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가는데 40분 돌아오는데 40분 거리이다. 그건 그렇다 쳐도 봉사하는 1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기다리며 때워야 한다. 봉사할 장소로 차를 몰고 가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 사이 글을 한 편 쓸까? 그곳 뒷골목들을 취재해 기사를 쓸까? 그것도 아니면 걷기 운동을 할까?

아내를 봉사 장소에 내려주고 공원 주차장으로 갔다. 오늘은 걷기 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서다. 6월 중순으로 접어든 이곳 날씨는 한여름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오후 3시라고 해도 기온이 35도를 넘나들고 있다. 긴 주차장 끝 부분 나무 그늘 아래에 차를 고이 모셨다.

주차장이 길다고 했는데, 끝에서 끝까지 왕복 도보로 근 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왔다.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고 문이 잠겼는지 확인을 한 뒤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외딴 곳에 와서 이것저것 눈요기하면서 도보여행을 하는 것은 자유 그 자체다.

사람들의 삶을 살피고, 도로 변 가게 사정도 헤아려보고, 은행 우체국 등지에 들려 당장 필요한 건 아니지만 카드도 찍어보고... 생각과 일을 매치시켜 시간을 보내니까 술술 지나간다. 파출소, 읍사무소도 이 시각은 오수의 시간이다. 코로나19의 재발로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다.

하천을 복개해서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줄 지어 서 있는 나무 그늘이 제법 큰 것으로 보아 수령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무 그늘을 친구 삼아 죽 걸었다. 끝에서 끝까지 1Km가 채 안 될 것 같지만 별 탈 없이 완주(?)한 셈이다. 마라톤으로 치면 42.195의 반환점에 이른 격이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밟아보고 싶은 것 말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시내 중심지를 관통하는 대로로 로타리를 거쳐 가면 주차장까지 무리하지 않고 닿을 수 있으리라.

우회하는 길이니까 조금 더 걷게 된다. 시간은 다소 더 걸리겠지만 차 세워 둔 곳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운동 양이 많아서가 아니라 무더위 탓에 땀이 제법 흘렀다. 자동차에 앉아 에어컨을 팍팍 털어놓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쉬기 위해 일하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다.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위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자동차 키도 호주머니에 잘 모셔져 있다. 산보를 떠날 때 잠금이 되었는지 확인까지 했다. 누가 차를 가져갔을까. 폐차 직전에 있는 고물 차를...

정신이 혼몽했다. 노혼(老昏)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도난 신고를 해야 할까. 112 전화로 신고를 하려다가 파출소가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가서 신고를 했다. 차번호와 차종을 물은 뒤 신분증을 달라고 했다. 경사 계급장을 단 여경이었는데 일 처리하는 것이 딱 부러졌다. 

그녀는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취했다. 순찰차와의 통화 같았다. 차 넘버와 차종을 알려 주고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바로 연락이 왔다. 예의 그 여경은 차가 혹 은색이냐고 내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아래 주차장 전파상 앞에 자동차가 있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파출소를 나오는데 자그맣게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내가 착각을 한 것 같다는 것이다. 전파상 앞에 도착하니 순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애마인 자동차도 별일 없이 그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나의 어설픈 행동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단단히 착각을 한 것이다.

기억력 감퇴는 그렇다 쳐도 판단 미스까지! 허망한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복장이 터져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다. 주차해 둔 곳보다 한 블럭 더 올라가서 차를 찾은 것이다. 복개한 곳이라 몇 개의 블록이 모양이 동일하다. 한 블럭 올라가서 자동차를 찾으니 있을 리가 있겠는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갔던 길로 되밟아 돌아 왔다면 이런 착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길을 밟는다며 시내 중심가 길로 돌아온 게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늙음에 대한 회한,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슬픔, 애먼 경찰들을 성가시게 한 미안함...

도보운동 뒤의 피곤함은 미처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잃었던 자식을 찾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살아야지.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진 말자. 맑은 정신으로 육체를 간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명재 목사(본 신문 발행인, Ph. D)

자동차 시동을 걸고 곧장 에어컨을 틀었다. 바깥의 높은 기온 탓에 에어컨 바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차창 밖 하늘을 쳐다보았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곳에 두 글자가 선명하게 비췄다. '늙을 로(老)', ‘어두울 혼(昏)’. ‘늙으면 정신이 흐려진다’는 뜻이다. 벌써 그 나이가 되었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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