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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기에 붙여-동양의 평화가 곧 세계 평화다이만열(숙명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편집부 | 승인 2020.03.26 21:33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오늘(3월 26일)이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 의사의 순국 일을 맞아 그가 이루려고 했던 조국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의 염원을 상기하면서 안 의사의 행적을 되돌아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하르빈 역두에서 일본의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의 의병장 안중근에 의해 포살(砲殺)되었다. 이토오는 메이지(明治) 유신기 일본의 서구화에 가장 앞장섰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했고 그 결과 한국의 시정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이토오는 이 때 한국과 동북삼성(滿洲)•외몽고의 문제를 두고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후초프(V. N. Kokovtsov)와 담판하기 위해 하르빈에 도착했다. 열차 안에서 러시아 측의 안내를 받은 이토오는 플랫폼에 내려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다가 안 의사의 총포에 쓰러졌다. 안 의사는 ‘대한만세’를 외치고, 혁명가를 부르다가 곧 바로 체포되어 하르빈 소재 헌병소로 송치되었다가 재판을 받기 위해 여순으로 갔다. 

러일전쟁(1904∼1905) 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는 한반도와 동북삼성•외몽고 문제를 두고 1907년에 제 1차 러일회담을 열었고 그 타결을 위해 코코후초프와 이토오가 만나려고 했다. 양국 사이의 중요한 현안은, 첫째 남북 만주의 분계선을 결정하여 북만주는 러시아가, 남만주는 일본이 각각 특수한 이권을 영유한다는 것, 둘째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과 맺은 조약 및 협정에 관한 이해관계를 승인하고 하등의 간섭을 하지 않을 것, 셋째 일본은 외몽고에 대한 러시아의 특수이권을 승인하고 하등 간섭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다시 말하면, 만주를 남북으로 분단하여 러•일이 각각 지배하고, 일본이 한국을 경영하고 러시아가 외몽고를 경영하는 것을 서로 승인하자는 것이었다. 이토오의 하르빈 행차는 한•중•외몽고에 주권상의 심대한 위해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르빈 역두에서 이토오를 포살하고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은, 고려말 원(元)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전수한 안향(安珦)의 후예로서 부친(泰勳)은 천주교에 입신한 한말 개화파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어릴 때  한학(漢學)을 공부하는 한편 무예도 익혀 사냥을 좋아했는데, 자서전 격인 <안응칠역사>에도 안중근의 사냥 이야기가 나온다.

그 뒤 그는 차차 민족의 장래와 세계의 움직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성경을 읽으면서 신학문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19세 때에 부친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도마라는 영세명을 받았으며, 일생동안 천주교 신앙을 간직했다. 안중근은 부국강병을 위해 국민교육을 절감하고 서울에 올라가 천주교 교구장 민(Mutel) 주교를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실패했다. 이 때 그는 천주교는 신봉하지만 서양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토로하였다.

안중근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중국의 산동과 상해에 갔다가 1906년 봄에 귀국, 평안도 진남포에서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에 나섰다. 그는 또 서우(西友)학회에도 참여, 애국계몽운동에 나섰고,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關西)지부를 설치하고 그 지부장으로도 활동했다.

1907년 7월 고종 황제가 퇴위당하고, 한국의 군대 또한 강제로 해산 당하자,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해조(海朝)신문과 대동공보사(大同共報社) 등에 관계하면서 국권회복을 역설하는 한편, 1907년부터는 의병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국권회복의 방향을 문화운동보다는 차츰 무력투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08년 초 연해주 지역의 한인촌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그 해 7월에는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자격으로 100여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경흥 지방을 공격했고, 그 뒤에도 일본 군인과 상인들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만국공법’을 들어 일본인 포로들을 놓아주는 바람에 그 뒤 석방된 포로들의 정보에 의해 오히려 안중근 부대가 크게 패하게 되었다. 며칠 씩 굶으면서 겨우 생환한 그는 그가 실천한 ‘만국공법’ 때문에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 후 1909년 초 크라스키노(煙秋)로 돌아온 그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으로 알려진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하고 의병을 재기하려고 노력했다.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보는, 그의 단지된 넷째 손가락 수인(手印)을 남기기 시작했다. 1909년 음력 9월 연추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나온 그는 이토오의 하르빈 회담계획을 알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10월 22일 하르빈에 도착했다. 그는 이토오 포살계획을 구체화하여 10월 26일 아침 하르빈 역사에서 거사를 결행했고, 곧 체포되어 일본 관동군의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를 비롯한, 이토오를 죽여야 할 이유 15가지를 당당하게 제시했다.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몸가짐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어 당시 통감부 통역관으로서 여순 형무소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소노끼스에끼(園木末喜) 등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런 영향으로 뒷날 일본에서 ‘안중근연구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특히 안중근이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은, 국제정치 곧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이는 당시 일본이 주장하는 ‘아시아연대론’과는 달리 한•중•일 삼국의 정립과 ‘연대’를 강조했다. 그의 <동양평화론>에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국제기구를 통한 다각적 협력을 비롯하여 경제통합•집단안보 등 구체적인 대안도 들어 있어서 그의 사상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동양평화론에 비친 안중근은 동북아 평화를 고민하고 실천하려 했던 ‘행동적인 평화주의자’였으며 결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집필을 끝내도록 말미를 달라고 했지만, 일제는 무엇이 급했든지 그런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순국한 여순 감옥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곳으로 뒷날(1936년) 단재 신채호(申采浩)도 이곳에서 옥사했다. 그의 순국 후 그 근처 어느 곳에 위치했을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주지 않아 남북은 그의 마지막 유언-“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마저 실천하지 못하고 있어, 안 의사의 기일이 올 때마다 후예로서 송구할 뿐이다.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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