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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연의 김천 문화유산 답사 - 한국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崔松雪堂)문상연(전 김천시보건소 소장)
문상연 | 승인 2019.02.10 23:59

한국육영사업의 어머니, 오아시스 같은 여장부 최송설당(崔松雪堂)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고장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짧은 탐방을 마무리하면서 때마침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조선어학회를 소재로 영화화한 '말모이'를 관람하였다. 식민국이었던 나라 중 유일하게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켰고, 광복의 기쁨을 주신 선열들의 희생과 고통을 작게나마 감사의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김천 사람들에 의해 국권회복운동, 3.1만세운동, 독립운동, 교육활동 등 불굴의 의지로 항일해 해방 후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겉핥기식 공부를 할 기회를 가졌다. 그 때 불굴의 여인 최송설당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민족사학(民族史學)의 빈 곳을 메꾼 여걸(女傑)의 나라사랑에 느껴진 진한 감동을 잊지 못하여 서설(瑞雪)이 내리는 날, 김천고등학교 송정(松亭)에 올랐다. 깨끗하고 푸른 숲 사진을 찍으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답사 계획을 세우며 며칠 열정을 쏟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永爲私學(영위사학) 涵養民族精神(함양민족정신) 一人定邦國(일인정방국)
一人鎭東洋(일인진동양) 克遵此道(극준차도) 勿負吾志(물부오지)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최송설당(1855.08.29. ~ 1939.06.16.)

(문당동-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은 문암봉(구봉산)이며, 인근에 세계적인 시설과 규모를 갖춘 종합스포츠타운과 김천대학교, 경북보건대학교가 우뚝 서있고 주변 마을엔 배천과 당골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교육가로 본관은 화순和順이고 본명은 미상(여성의 굴레로 호적에 올리지 못함)이며, 김천 문당동에서 서당을 개설한 양반가의 아버지 최창환(崔昌煥)과 어머니 정옥경(鄭玉瓊) 사이에서 무남삼녀(無男三女) 중 장녀로 태어났다. 조선 마지막 왕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보모(保姆)로, 전 재산을 희사하여 민족의 앞날을 짊어질 인재들을 길러 낼 교육기관을 설립한 한국육영사업의 어머니이며 자호(自號)는 송설당(松雪堂)이다.
(원래 김천에 살던 양반가에서 평안도로 이사를 간 (증)조부가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전라도 고부로 유배를 갔다. 다시 아버지가 8대조 이상 선조의 고향인 김천으로 이사를 왔기에 훗날 '고부 할매'로 불린 연유도 여기에 있다.)

송설당은 한학과 한글 등 엄격한 교육을 가르친 부친께서 1886년 별세하자 명문가였지만 아들조차 없으니, 홍경래의 난으로 인한 멸문 집안의 한을 풀어드리기로 맹세하고 1894년 약 40년 살던 고향을 떠나 상경하였다. 당시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엄비를 총애하여 왕자를 갈구할 때였는데 독실한 불자였던 송설당이 강남 봉은사에서 엄비의 친여동생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왕자 탄신을 발원하는 100일 기도를 정성을 다해 올렸고, 최고급으로 출산용품을 진상하고, 영친왕의 출생을 현몽(現夢)하는 일 등이 계기가 되어 1897년 영친왕의 보모상궁으로 입궁하게 되며 귀비(貴妃)에 봉해진다.

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10여 년간의 궁중생활을 하며 고종으로부터 조상의 죄를 벗는 신원(伸寃)을 받았다. 이로써 90년 만에 몰락 가문의 억울함을 풀게 된다. 엄비의 도움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고향 김천에 무수한 자선을 베풀었다. 그 예로, 1908년 미국동포 간행 공립신보에 의연금 기탁, 화수회(花樹會)를 통한 원근 종친(宗親)에게 토지와 자본금 지원, 1912년 교동 주민을 위한 벼 50섬 쾌척, 1917년 금릉학원 유지비 건립, 법주사 복천암, 화왕산 도성암, 금강산 유점사 등지에 한 크고 작은 시주, 소작인들에게 1년 추수한 곡식을 몽땅 내 준 일 등을 들 수 있다.

(1922년 발간된 『송설당집』은 3권 3책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글을 제대로 배웠기에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당당히 교류할 수 있었다. 송설당은 여류 문인으로서 한시 259수와 국문가사 50편을 남겼는데  '소나무'와 '어버이생각'이라는 시 등을 통해 신의와 충효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고, 가문의 번성을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소나무 松' / 사진:문화예술회관 앞)

담장 안에 심은 소나무 한 자 남짓하여 / 가지와 잎 몇 성상 겪었냐고 물었더니 / 내 나이 이미 늙음을 비웃기나 하듯 / 다른 날 동량됨을 보지 못 하리네


('사친思親. 어버이 생각')

深深漢江水(깊고 깊은 한강수요) 高高三角山(높고 높은 삼각산이로다) 昊天在其上(너르고 큰 하늘 그 위에 있어) 雙手遠難攀(손으론 아득하여 잡기 어렵네) 

"사회의 발전은 인재의 교육에 있고 교육의 확장은 재정의 확보와 무관치 않다. 마땅히 해야 할 바임에도 지금 재정이 궁핍하다는 이유로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회의 급한 일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30만2100원을 내어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의 자금을 대고자 한다."(동아일보 3월 5일자 신문에 실린 성명서 일부) 

송설당의 이야기가 주요 신문지면을 일제히 장식했다. 평생 모은 희사 금액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액수로서 현재로 환산하기에는 어렵지만 300억 원 이상이 될 것이다. 송설당의 재산 형성은 엄비의 은혜가 "태산같이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표현으로 보아 왕실 재산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업적 중에서 이미 70세를 넘긴 고령임에도 우리민족의 미래를 위한 사립 김천중고등학교 전신인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세운 것은 남존여비라는 인습 이 잔존하는 상황에서 이룬 '대과업'으로 민족의 은인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 경상북도에서 최초이다. 

(교육사업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

당시 한민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국권을 상실한 나라, 총독부는 근대화란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 대신 일본의 말과 글을 가르치도록 강요하는가 하면 일본의 우월성을 주입하며 신민의식을 심는데 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송설당은 학교 설립에 담긴 의미를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자녀가 없었던 송설당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일제 강점기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원력을 굳건히 했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돈만 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사사건건 난관에 부딪쳤다. 1930년 3월24일 총독부와 경상북도 교육청에서는 인문계 고등학교 설립 신설을 단칼에 거절하였다. 실업학교로 전환하라고 요구했고, 학교 설립에 필요한 평가액이 당초 금액(30만2100원)에서 32만원으로 증액되었다고 제동을 걸었다.

송설당은 또 한 번 결단을 내린다. 1912년에 마련한 서울 무교동 94번지 55칸짜리 저택(당호 송설당, 현 코오롱빌딩 자리, 평가액 2만3천원)과 남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설립학교 내 주택인 정걸재(貞傑齋)로 옮기고 부족한 금액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김천으로 내려와 총독부 관계자와 총독 부인을 직접 만나서 면담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나자 총독부는 송설당의 의기에 감동하며 백기를 들었다. 즉 인문계 고등학교에 실업과목을 포함시키겠다는 내용으로 1931년 3월, 김천보통학교  설립인가를 공표하였다. 이로써 그 해 5월 9일 첫 입학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시작이 어려웠던 만큼 교육열도 남달랐다. 정원을 50% 초과 선발해 김천뿐만 아니라 선산, 상주, 성주 지역 등 최대한 많은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교사 월급을 서울 학교 두 배로 지급하는 방법으로 우수한 교사를 확보했다. 모든 운영 방침이 교육 위주로 돌아갔다.

송설당 나이 80세가 되던 1935년 11월30일 설립자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오카자키 데츠로(岡崎哲郞) 경상북도지사,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사장, 이인 변호사 등 1천여 명에 이르는 경향 각지의 저명인사가 총 출동해 단상 위에 앉았다.
(여운형은 축사에서 "열차 편에 김천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탑이라 할 만한 이 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 있음을 보니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았다. 사막 가운데 이런 오아시스가 일개 부인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것이라고 하니 동서고금 역사에 그 유래가 극히 드문 것..."이라며 극찬했다.)

산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송설당 동상 건립운동에는 조만식, 방응모, 윤치호 같은 저명인사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멀리 만주에서 까지도 동참한 성금으로 학교 내 송설당 여사 기념동상이 건립되었다.
(왼쪽. 1935년 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으로, 1944년 일제에 의해 전쟁용 철물로 공출당해 사라졌다. 오른쪽. 1950년 새로 건립한 윤호중 작품으로 근대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되어 송설역사관에 있으며, 현재 교정에 서있는 동상은 2011년 문화재를 복제하여 다시 건립한 것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송설당은 하객을 맞이했고 이 자리에서 "재단에서 지급받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학생들을 위한 과학관 설립에 필요한 건축비용으로 사용하겠다."며 수중에 남은 돈까지 모두 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1939년 마지막 용돈까지도 학교에 출연하고 거처인 정걸재에서 조용하게 눈을 감았다. 마무리 10년을 영원한 노스텔지어 김천에서 빈손으로 떠난 송설당의 장례는 7일장으로 치루어졌고, 수만의 조문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눈물로 배웅하였다.

 최송설당의 84년 일생 가운데 김천에서의 생활은 상경 전 40년, 귀향 후 10년 등 모두 50년이었고 나머지는 김천을 오가며 지냈다. 1963년 8월15일 고인에게 대통령 문화포장이 추서되었다.

위태로운 민족을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저히 무소유를 실천한 최송설당. 정말 대단한 여장부였으며 비범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永爲私學(영위사학) 涵養民族精神(함양민족정신)’의 건학이념으로 개교 이래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무수한 동량(棟樑)을 배출한 명실 공히 경북 최고의 명문 사학(私學)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문에는 ‘서울대 17명, 의학계열 13명, 과학기술원 17명’ 이라는 대학 합격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반듯하게 걸려있었다. 영원무궁토록 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최송설당의 엄중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학 김천고는 우리고장의 빛나는 자랑이다.

송설당 묘는 송정 뒷산인 황악산 줄기 고성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직지천 너머 고향인 문당동 문암봉(구봉산)을 바라보고 있다(왼쪽이 난함산이다).

(정걸재 현관에서 찍은 최송설당과 수임5이사. 뒷줄 왼쪽부터 이한기,
김종호,조상걸,최동열,고덕환,최석태이사)

송설당 거처였던 학교 내 정걸재는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고 배롱나무가 지킴이로 있으며, 부속건물인 취백헌(翠白軒)은 안채이면서 송설당이 식사하던 곳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묘소로 오르는 양쪽 계단 옆으로 단풍나무가 길을 외롭지 않게 지켜준다.

퇴궐한 이후 많은 사찰에서 불사를 이끌었으며 특히 김천 청암사 입구 주차장에서 15m 오른쪽(일주문 앞 약 100m)에 자연석 표면을 갈아서 각석한 시주비(대시주大施主 최송설당)와 천왕문에서 60m 계곡 왼쪽에 가장 큰 붉은색 최송설당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개교 10주년 기념으로 수임5이사 공적비는 송설역사관 옆에 위치해 있다.

본관, 강당-세심관, 역사관,교훈,기숙사(청운료) 및 도서관, 식당 

♧참고자료 : 『최송설당』, 김창겸, 경인문화사, 2008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김천항일독립운동사』 / 김천문화원-묘지기행/ 법보신문 2013.05.27. /신동아 2007년6월호 / http:ko.m.wikipedia.or / jyunchulkim>bbs.board / http:www.yeorijob.com / news 外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法頂)

(청암사에 있는 경상북도문화재 :
대웅전-제120호, 다층석탑-제121호, 보광전-제288호)

문상연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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