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구 시집 <물망초 꿈꾸는 언덕에서>(천년의 시작, 2023년 2월 출판)

'물망초(勿忘草)'는 영어로 a forget-me-not이다. 나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시집의 제목은 보통 포함하고 있는 시의 제목에서 뽑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황진구의 시에 '물망초 꿈꾸는 언덕에서'란 시는 없다.

이 시집의 3부 명칭으로 이것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3부뿐 아니라 1부, 2부, 4부의 명칭도 마찬가지였다. 각 부의 제목을 포괄하고 있는 시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든 결정물(結晶物)이다.

일반 시집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한 제목이다. 적지 않은 고뇌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시를 부(部)의 제목으로 삼고, 또 거기서 대표성 가진 것을 시집 제목으로 사용하면 일이 보다 쉽고 편리하게 진척될 텐데 말이다.

부에 속한 시들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제목을 만들어 내는 데는 적지 않은 수고가 투여되어야 한다. 황 시인은 4부까지의 제목을 그렇게 창조했고 그중 3부의 명칭을 시집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왜 물망초인가? 왜 물망초를 꿈꾸는가, 그것도 언덕에서... 이 시집에 실린 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나'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시인도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쓰고 있다.

그는 '시간을 잊어버리고 나이도 잊었다'(나이테)며 한탄하고, 심지어 '산다는 건 잃어버리는 것투성이'(우리는 매일 잃어버리고 산다)라고 고백한다. 잊고 잃음이 시구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많은 시에서 이것이 보이지 않게 잠복되어 있다.

왜 이 점(잊음과 잃음)이 그의 시를 관통하게 되었을까. 시집을 여는 '시인의 말'에서 읽어낼 수 있다. 황 시인은 '크게 네 번 생명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적고 있다. 네 번이나 생사의 접점에 섰던 경험은 '잃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또 병상의 격리 생활은 육적 정신적 고통의 시간으로 잊고 싶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것이 단절되어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염려한다. 잊어지고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시인은 이것의 보호막으로 두 가지를 설정한다. 하나는 ‘자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이다. 큰 틀에서 보면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시인은 두 개를 너무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보호막의 두 축으로 설정한다.

시집 어느 쪽을 펴 보아도 자연의 '속성-변화-아름다움'과 연결지을 수 있는 시어들이 쏟아진다. 무작위적으로 시집을 펼쳤다. 54쪽 '아버지는 일용직 근로자'란 제목의 시가 나온다. 산, 고목, 비바람, 갈잎, 비, 꽃... 자연을 이루는 요소가 즐비하다. 다른 시도 마찬가지다.

황 시인뿐만 아니라 자연은 문학 특히 시의 소재로 많은 사람들이 차용한다. 하지만 황 시인에게 독특하게 작용하는 것은 '자연'이 '잊음 또는 잃음'을 반추하는 요소 내지 배경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여기에 고도의 시적 테크닉을 구사해서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물망초 꿈꾸는 언덕에서'에 등장하는 또 다른 축은 '사람'이라고 했다. 친구와 역사 인물(계백) 등도 등장하지만 주종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내, 아들 등 가족이다. 시인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이 분들을 잊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그들과는 부모로부터 받은 내리사랑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아내와 자식을 위해... 불평 한마디 없이 살아온 고목 같은 늙은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아버지는 일용직 근로자'). 또 어버이날 아무리 불러봐도 모습 드러내지 않을 어머니를 '무명옷을 명품으로 입고 사신 어머니... 너무너무 사랑합니다'라고 독백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어머니 서).

부부는 쌍방통행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못할 때 한쪽이 희생이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시인은 아내로부터 일방적 사랑만 받아 왔다. 그러려고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병약한 육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내에게 고백한다. '의무를 다하고도 모자라 땀 흘리는 당신 때문에 행복한 하루를 살았어요. 고맙습니다. 당신 때문에'('당신 때문').

황진구의 시집에서 가족의 사랑 나눔을 읊은 시, 시구, 시어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있다. 그의 시에 농축되어 있는 동심(童心)이다. 이 시집에서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마음을 배제한다면 시가 아주 초라해질 수 있다. 계산되지 않은 순수가 배경으로 든든하게 받쳐주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는다. 가령 이런 것을 들 수 있겠다.

해님 달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넉넉한 마음으로 마주한 한가위

까마중 먹은 까만 이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 짓는 어머니 얼굴 보름달'('둥근 하얀 보름달' 중)

마치 동시(童詩)를 마주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동심이 시집 전반에 흐르고 있다. 환갑이 지난 사람의 마음에 이 만큼의 순수가 남아 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잊음 또는 잃음'의 시인 황진구는 외로움을 싫어한다. '함께 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역사적 인물(계백)과 소설 속 주인공(나타샤)까지 끌어들인다. 이들이 모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개인주의ᆞ·이기주의가 횡행하는 가운데 그의 공동체 지향의 시들이 품격 있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말 한 가지. 시집 서두 '시인의 말‘에서 황 시인은 스스로 '생명의 피리를 부는 목사 시인'이라고 썼다. 그는 기독교 목사이다. 목사는 목사가 즐겨 쓰는 용어가 있다. 그런데 시집 <물망초 꿈꾸는 언덕에서>는 기독교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정독을 할 때 서너 군데 잡히는 것이 전부이다. 요란 떨지 않고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의지가 읽혀서 좋다.

이것이 황 시인의 첫 시집이라고 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독식(獨食)만을 외쳐대는 작금, 황진구 시인이 갖고 있는 동심이 시로 엮여 사회에 잔잔하게 퍼져 나가면 좋겠다. 그래서 보다 맑고 밝은 사회가 되는 데 일조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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