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수상] 전통 붕괴 or 전통 순화?

이명재 목사(덕천성결교회, 본 신문 발행인)

오늘은 팔월 한가위입니다. 참으로 오래 된 우리의 전통 명절입니다. 맑은 하늘, 푸르고 높은 하늘이기를 바랐습니다만 이곳 부산의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군요. 세상사를 반영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추석 명절 잘 쇠시라'는 인사로 찌푸린 마음을 녹여 봅니다. 민속 대명절이라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어려운 시기인데도 고향을 찾는 많은 사람들을 뉴스는 끊이지 않고 알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만큼이나 바쁘게 살아가는 제 주위 사람들이지만 잊지 않고 인사말을 전해오는 사람들이어서 더 고맙습니다. 이럴 때마다 남은 삶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꿈꿉니다.

제 형제들이 모여서 추석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20여 년 전, 처음 예배를 드렸을 땐 무척 어색했지요. 전통제례에 젖어있던 형제들이 예배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도기로 제사와 예배를 병행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예배드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새 식구로 들어옴으로써 감사예배가 일반적 흐름이 되었습니다.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게는 질부(姪婦), 즉 조카며느리 되는 사람들이 믿음 좋은 가정의 출신이어서 가능한 일이지요. 아버지가 장로님 그리고 어머니가 권사님 가정의 자녀들입니다. 믿음으로 양육한 아이들이어서 얼마나 반듯한지 모릅니다.

예배 끝나고 특별히 마련한 추석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갈수록 편한 방식을 찾는 세상이지만 저의 세 형수님들이 손수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의 일부분을 잃기라도 하는 것처럼 추석 음식에 대한 집착이 큽니다.

제가 '독특한 명절 음식 맛'이라고 명명한 바 있지만 설 및 추석 명절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입니다. 독특한 맛,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함께 떠올라 뚜렷한 향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생활의 에너지가 됩니다.

추석은 한국식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이지요. 우리나라가 농본국가였을 때는 추수에 대한 의미가 컸었지요. 하지만 '빠름'과 '편리'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인 지금 추수 감사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거창에서 그리고 김천에서 부산 큰댁으로 모였습니다. 아이들을 비롯한 젊은 식구들은 핑크빛 미래로 한동안 얘기 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육칠팔십대의 지점에 있는 우리 형제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 과거였습니다.

얼마 전 고향(함양)을 방문했을 때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반 세기가 넘는 세월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탓이지요. 저와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조차 벌써 이 세상에 머물지 않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천수를 다 누린 사람들은 그것에 반비례해서 슬픔의 정도가 다소 줄어듭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의 이야기는 슬픔에 더해 안타까움 더 큽니다. 제 주위만 해도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팔순의 큰형님은 죽음에 대해 말할 때가 많아집니다. 스스로 살 날이 많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가 미쳤습니다. 한 고향 사람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조문을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부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형님은 고인의 자녀들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정이 그게 아니라면서.... 인정이 메말라 갈수록 경조사로나마 서로를 챙겨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죽음의 황망한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고향 사람 한 분은 같은 시간 대에 같은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치료 마치고 보자며 인사하고 진료실로 들어섰습니다. 치료받고 나오니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쓰러져 장례식장으로 갔다며 허망함을 토로했습니다.

전통 제례는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데 비중을 두는 행사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산 자 중심의 모임으로 흐르는 게 일반적 추세입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나누기 때문에 활기차고 생생한 내용으로 채워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릅니다. 과거를 회고하는 이야기, 죽음을 화두로 삼아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모인 젊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현실적인 얘기를 하나 덧붙여야겠습니다.

지금 연로한 세대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젊은이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게 될 텐데, 조상의 유택(산소) 관리가 가능하겠느냐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벌초 등 선산 관리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문제에 대한 대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산소를 계속 후손들이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벌초 등 관리를 위탁하자는 것, 셋째는 유골을 화장해 납골당에 모시자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세대별로 주장이 나뉘어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어른들은 유지하자는 쪽이었고, 자녀 세대들은 다른 방법, 즉 납골당에 모시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입장을 밝히지 않은 젊은 사람들은 비밀투표에 붙이면 후자 쪽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은근히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대의 흐름이려니 하고 마음을 꾹 눌렀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질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여기려고 애썼습니다. 아이들은 '전통 붕괴'가 아니라 '전통 순화'라고 얘기하겠지만 과연 전통에 순화가 가능할까요?

그때 대문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친가에 갔던 조카사위 부부가 도착했습니다. 바닷가 횟집에서 횟거리를 가득 장만해왔습니다. 명절 때 관례화되다시피 한 회 파티입니다. 이번에는 조카사위가 대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이 두 사람이 더 합류한 셈입니다. 산소 문제는 더이상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른 세대는 모두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습니다. 다시 밝은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이번 추석 명절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가족이 모였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반작용이겠지요.

이명재 lmj228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