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추모] 김지하 시인 '불귀(不歸)'의 몸이 되다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이명재 | 승인 2022.05.09 20:08
1970년대 독재정권과 맞섰던 고 김지하 시인의 빈소가 9일 오전 강원 원주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시인은 전날 오후 원주시 자택에서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1970년대 우리의 영웅 김지하!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떴다. 병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그는 한때 우리의 영웅이었다. 그의 기개는 고고했고, 지조는 대쪽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의 시, 그의 글을 찾아다니며 읽었다.

시집 <황토>(한얼문고, 1970), <타는 목마름으로>(창비, 1975).... 그의 시들은 노래가 되었고, 뒷골목 막걸리집 안주가 되어 주었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며 밤을 지샜다. 김지하는 이렇게 영웅이 되어 우리와 늘 함께 했다.

그의 시집은 금서가 되어 독자와 격리되었다. 복사본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지적 욕구를 채워주었다. 복사본이 복사를 거듭해 글자와 책면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변하도록 우리는 그의 시를 회람했다.

김지하 시집 <황토>(한얼문고, 1970). 당시 금서로 읽을 수 없었던 이 시집을 찾아 청계천 헌책방과 도서관을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동대문시립도서관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금서가 된 그의 시집, <황토> 찾아 천리길

원본을 구하겠다며 청계천 헌책방을 샅샅이 뒤지기도 했고, 도서관을 돌며 그의 시집을 찾아보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중 한 도서관, 동대문시립도서관에서 시집 <황토>를 발견하고 노다지를 찾은 광부처럼 쾌재를 불렀던 적도 있다.

도서관에도 빈틈이 있을 거란 예상이 적중을 했다. 금서는 도서관 대출도 금지된다. 미처 체크를 하지 못한 그 시립도서관에서는 대출을 해 주고 있었으니.... 황토색 겉표지에 투박한 인쇄체 글자가 수놓인 시집... 도서관에서 복사한 선명한 글자의 시들을 주위에 돌리고 으쓱했던 적도 있다.

그뿐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책 출판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시대였다. 그의 책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불온서적 소지죄로 잡혀갈 때였으니까. 일본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곳에서 책을 냈다. 김지하 작품집 <不歸>(1975)와 그의 옥중투쟁의 기록 <김지하는 누구인가>(1979)이다. 모두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위원회에서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판이 불가능했던 김지하 관련 도서가 일본에서 출판되었다.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위원회에서 1975년 출판한 김지하작품집 <不歸>와 1979년 출판된 그의 옥중투쟁의 기록 <김지하는 누구인가> 표지이다.

우리나라에서 금지된 김지하 책 일본에서 출판하다

이 책들은 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와 함께 아직도 내 서재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어렵게 구입한 책들이다. 김지하에 대한 글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다. 많은 청년학도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김지하는 젊은이들을 단련시켰다.

1991년으로 기억한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이은 노태우 정권 때, 많은 청년 학도들이 군인 정치를 몰아내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며 몸부림쳤다. 특히 대학가의 쟁투가 치열했다. 명지대 강경대, 성대 김귀정 등 학생들이 분신으로 저항할 때다.

우리의 영웅 김지하가 신문 지상에 글을 하나 기고했다.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글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나와서는 안 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 칼럼은 분신으로 정권과 맞서는 대학생들의 투쟁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75년 5월 19일 법정에 나온 김지하. 이날 김 시인은 재판부에 대한 기피를 구두로 신청하고 끝까지 싸울 결의를 다짐하였다.

무너져 가는 김지하의 지조

그 글이 발표된 직후 나는 오마이뉴스에 '이젠 김지하 시는 없습니다'란 글을 기고해 그에 대한 실망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즈음 김지하는 생명 사상에 천착해 있다는 말이 들렸다. 김지하의 칼럼 '죽음의 굿판...'은 그를 변절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평생 지조를 지키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도 그 길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웅이었던 김지하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롭던 비판안(批判眼)도 무디어져 갔다.

1990년대 말 자신은 생명사상의 중요성 때문이었다고 했지만 학생운동과 척을 지더니 보수의 상징과도 같은 박근혜가 2021년 18대 대선에 나오자 그를 지지하는 대열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의 과거가 아깝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이 글로 인해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끝내 박근혜 지지 대열에 서다

그의 시 '오적(五賊)'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사회 참여시로 이만한 작품을 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1975년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을 살다가 출소해서 자신의 옥중 생활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글의 제목이 '고행…1974'로 되어 있었다.

3회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그의 쉼 없는 투쟁 의지가 녹아 있는 글이었다. 칼럼 중간에 삽입된 그의 사진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까까머리 청년이 무명 한복을 입은 채로 결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은 투사의 전형으로 비치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김지하 시인의 장모이고 그의 외동딸 김영주는 김 시인의 아내이다. 이들은 먼저 귀천의 길에 올랐다.

파란만장한 김지하의 삶.... 장모 박경리, 아내 김영주 뒤를 따라 '불귀'의 몸이 되다

사람의 삶을 흔히 파란만장하다고 표현한다. 김지하만큼 이런 삶을 산 사람이 또 있을까.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사위, 미술사학자 김영주의 남편인 김지하, 우리의 예술사에 한 획을 긋고 세상을 떴다.

1975년 일본에서 출판한 그의 작품 선집 이름이 <不歸>이다. 왜 제목으로 이것을 썼는지 모르겠다. 작품 중 하나를 택해 서명(書名)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불귀’라는 글은 여기에 없다. 이 단어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김지하는 ‘불귀’의 몸이 되었다. 그의 구수한 이야기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아쉬운 것은 한때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맹활약했던 그가 말년에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과 글을 썼다는 것이다. 이것까지 짊어지고 귀천의 길에 올랐겠지? 김 시인의 안식을 빈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저작권자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명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상호 : 김천일보 김천iTV  |  경북 김천시 거문들1길 88-74  |  전화번호 : 054-436-2287
등록번호 : 경북, 아 00398  |  대표전화 : (054)437-0478  |  등록일 : 2016년 01월 18일  |  발행인 겸 편집인 : 이명재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성숙  |  e-mail : gcilbonews@daum.net
Copyright © 2022 김천일보 김천iTV.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