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덕에 하루 황홀경에 빠졌다가 깨어났습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감동의 강도를 더하는 법인가 보죠? 저의 세 아이가 연출한 이벤트였습니다.

원래 4월 9일 엄마의 환갑과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김천에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중요한 약속이 그날로 잡혀서 아이들과의 만남은 무효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못내 아쉬웠던지 둘째가 전화를 해 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사정이 닿으면 일주일 앞당겨 만나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4월 2일 토요일이 되네요... 오빠한테도 연락을 해 볼게요."

조금 뒤 전화벨이 다시 울렸습니다. 첫째는 방송 일이 마감에 걸려 시간 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 부부가 상경하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의 서울 길입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양식, 한식, 중국식 등 뭘로 할까, 엄마 아빠 드시고 싶은 걸로 하겠다, 회 또는 갈비? 등등으로 조잘대며 의사를 타진하는 듯하더니 양식으로 결정하고 예약까지 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서울은 먼 거리에 있는 땅이어서 한 번 올라갈 때마다 몇 가지 일을 보고 옵니다. 하루 전 날, 그러니까 4월 1일(금) 오후 선배가 하는 카페에 들려 내린 커피를 한 잔 하고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인테리어 등 건물을 꾸미는 데 필요한 연장(전기톱, 타카, 목자재 등)을 차에 실었습니다. 지은 지 30년 된 우리 교회엔 손 볼 곳이 많습니다. 흩어져 있는 책을 모으기 위해서는 당장 책장이 필요합니다.

건축학도인 선배는 제게 없는 달란트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관계하게 된 것은 김천의 한 건축 현장에 감리사로 일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배는 수요 밤 예배를 저희 교회에서 함께 드리게 되었거든요.

선배 부부와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된 것으로 볼 때 손님 맞이한다고 신경을 쓴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혼기가 된 아이들이 대화 주제에 들어 있기도 했습니다.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꿈 꾸시고 내일 뵈요. 아참,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일찍 깨우지 마세요. 모처럼 푹 좀 자게요."

아내는 집안 정리를 해주느라 늦은 시간까지 손발을 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치웠다곤 하지만 애 엄마의 성에 찰 리 없습니다. 빨래며 설거지며 냉장고 정리정돈 등에 짧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래도 힘들다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각자 몇 가지 일을 마치고 나니 정오 가까이 되었습니다. 예약된 레스토랑에 도착했습니다. 주인장이 나와서 주차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친절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업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담스런 음식점이었습니다. 주문을 받아 즉석에서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 메뉴는 스테이크인데, 그 앞에 부대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습니다. 입에 선 독특한 음식물들을 하나씩 음미하면서 먹었습니다. 아이들이 연신 챙겨서 입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레스토랑은 젊은 청년이 운영했는데, 어머니가 와서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머리 희끗한 어머니와 젊은 청년이 빚어내는 레스토랑 분위기가 손님들을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음식점도 주인의 성향에 따라 업(up)과 다운(down)이 교차하는 것 같습니다.

스피디한 사회를 실감합니다. 조카가 이 사실을 알고 급하게 케이크를 보내왔습니다. 몇 시간 만에, 안 사실을 주문하고 현장으로 배달되는 사회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케이크에 꽂을 양초도 독특하군요. 앙증맞기조차 합니다.

"I ♡ YOU! 60"

영어알파벳(I YOU)과 특수문자(♡ !) 그리고 환갑을 뜻하는 아라비아 숫자(60)에 각각 심지가 있어서 불을 붙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조카 내외의 순발력에 고마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손님이 우리뿐이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돌아가면서 부를 수 있었습니다.

양식집이라고 했지만 메뉴판을 보니 이탈리안 양식집이었습니다. 7코스의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스테이크는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먹고 나니 뭐라 그럴까요.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커피와 아이스크림으로 먹는 일을 마치고 딸 아이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입니다. 신발 하나 사러 백화점까지? 이런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묵묵히 따르기로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환갑을 맞은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도 아이들로부터 구두 선물을 받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선물 받는 입장이라…

백화점은 체질상 제게 맞지 않는 곳입니다. 넓은 공간이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이렇다 보니 정작 찾는 곳에 도달하는 데는 '천신만고'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보다도 고가의 상품은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제 의식은 여전히 시골 5일장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백화점, 그것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으로 아이들이 우리 부부를 데리고 간 이유가 있습니다. 딸 아이가 그곳에 근무를 하거든요. 신세계 그룹 디자인실 디자이너 일을 하면서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절기 행사 때마다 백화점에 걸리는 알림 배너의 디자인은 딸 아이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침 구두가 세일기간이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습니다. 구두를 고르는 데도 딸 아이들과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딸애들과 아내는 가급적 젊은이 취향을, 저는 나이에 걸맞게 중후함이 풍기는 구두를 선호했습니다. 신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직원의 말을 존중해 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젠 돌아가도 좋을 것 같은데 아이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청바지코너를 들려야 한다는 겁니다. 재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마이 재킷에 어울리는 청바지를 하나 사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라고, 됐다고, 지금 입는 바지로도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묻고 또 물어 겨우 청바지 가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그 중 거부감이 덜 이는 것으로 하나 골라잡았습니다. 일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마음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젠 정말 끝났겠거니 하고 있는데 딸 아이가 반 팔 티를 하나 골라 왔습니다. 저는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두 한 켤레 사러 와서 청바지까지는 그렇다고 하지만, 또 티까지...? 아이들은 아빠가 보다 젊게 보이기를 바랐습니다. 복장도 젊게, 머리도 젊게(흰머리를 염색하기를 바람)... 이렇게 할 때 생각이 젊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아빠 상(像)이 이런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스코트가 인쇄된 티를 골라 왔습니다. 저는 평소 사람의 외모는 나이와 조응(照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애늙은이가 부조화이듯이 나이 지긋한 사람이 20대의 외모를 하고 다니는 것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옷도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제가 청년들이 좋아하는 옷을 꺼려하는 이유입니다.

구두ㆍ청바지ㆍ반 팔 티, 그야말로 한 아름의 선물입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속담처럼 아내 환갑으로 인해 제가 과외의 선물을 듬뿍 받은 격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마감했다가는 아내에게 무척 미안할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딸아이들이 백화점 5층 여성 의류매장으로 팔을 끌었습니다.

애들 엄마에게 선물할 원피스를 사기 위해섭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겁이 덜컥 났습니다. 백화점 여성 의류의 값이 만만치 않다는 소리를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계산하는 것이긴 하지만… 함께 있기 거북할 때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게 제 성격입니다. 승강기 앞 의자에서 쉴 테니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한참 뒤에 세 모녀는 환한 미소를 띠면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대형 쇼핑백을 든 채로. 그 안에는 애들 엄마의 옷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저를 위로하듯 또 자기 옷 산 것을 합리화하듯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이 원피스 얼마짜리인 줄 아세요? 자그마치 95만 원..."

아내는 내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엷은 미소를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예상 밖의 주제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보, 오늘 반품할 옷이래요. 직원이 창고에 가서 겨우 찾아왔대요.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딱 내 옷이에요. 맞춰도 이렇게 만들기 힘들 걸..."

지나고 보니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내 옷을 사준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에 없다는 건 옷을 사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무능한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자기의 말이 제 성을 채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 글쎄 70% 할인해서 준다는 거예요. 그럼 얼만지 아세요? 285,000원! 이 양반 놀라지도 않네... 그게 끝이 아니에요. 아이 직원 할인해서 256,000원에 이렇게 딱 맞는 옷을 샀으니… 아아, 행복해라!"

이렇게 해서 저희 부부는 백화점 옷을 입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마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세 아이는 대학에서 한 전공을 살려 각자 애정을 갖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는 30년을 서울 살다가 시골로 내려왔는데, 아이들은 자기들 태어난 고향이라며 서울로 올라가서 살게 되네요.

지금은 서울 와서 살라고 해도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시골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이 제 몸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명 바지에 양복 상의를 걸친 격이라고나 할까요. 좀 느리게 여유 갖고 사는 시골 생활이 좋습니다. 제 생일도 얼마 전 지나갔습니다만 아내 환갑 덕에 호사한 서울 나들이었습니다. 원님 덕에 분 요란한 나팔소리!(耳穆 作)

이목  gcilbonews@daum.net

이목  gcilbonews@daum.net

<저작권자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