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Ph. D)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가서 윤석열의 기자회견을 들었다. 책 혹은 폰을 들고 가는 버릇이 있다. 우연이었다. 뉴스를 살펴보기 위해 폰을 열었다. 윤석열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있었다. 16분에 걸쳐 윤이 낭독한 기자회견문은 여러 가지 생각을 교차하게 했다.

언뜻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오래 전 TV 화면이다. 지금은 그런 일이 사라졌다지만 예전엔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해상에서 표류하는 북한 사람을 우리 쪽에서 구조해 치료하고 먹이고 입힌 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일 말이다.

후의를 입은 북한 사람들이 자유의 다리를 건너 조용히 가면 좋으련만 북한 영역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쪽을 향해 쑥떡을 먹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남한에서 호의를 입을 땐 순한 양 같던 사람들이었는데… . 어린 마음을 파고든 것은 허탈감이었다.

윤석열과 돌아간 북한 사람들이 무슨 관계가 있나. 윤석열의 기자회견문은 문재인 정권에 퍼붓는 저주의 말로 일관했다. 윤도 3개월 전까지 문재인 정부에 소속된 검찰총장 아니었나. 그런 그가 유치한 단어를 동원해 정권에 저주를 퍼부은 것은 인간 이하의 행동이다.

윤은 기자회견문에서 '국민'을 여러 번 언급했다. '국민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국민 약탈을 막아야 한다', '부족한 제게 국민 여러분께서 많은 격려와 지지를...', '국민들께서 사퇴의 불가피성을 이해해 주시고', '이러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 국민을 위한 정치의 시작' 등등.

정치인들이 쉽게 써먹는 단어가 '국민'이다. 국민을 동원해서 곧잘 자신을 합리화한다. 윤이 정치 일선의 경험이 없다고 회견문에서 말하고 있지만 회견문 낭독을 듣는 내내 어휘의 저급함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사용한 '국민'이란 단어를 '기득권자'로 대체하니 문맥이 더 매끄러웠다.

윤이 말한 국민은 기득권층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윤에게 미려한 어휘와 매끄러운 문장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 테다. 회견문에는 특수부 검사의 투박스럽지만 사실성 어린 단어와 문장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작성해 준 것 같은데 마치 핫바지에 양복을 걸쳐 놓은 것 같이 부자연스럽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6월 29일(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가령 이런 것을 들 수 있다. 그의 회견문에 '국민 약탈'이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온다. 문재인 정권이 국민을 약탈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선 정권이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약탈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뜻한다.

일제가 우리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갈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군사독재 때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군부 세력이 국민 위에 군림할 때나 통할 수 있는 말이다. '죽창가'가 한일관계를 망쳤다는 그의 발언에 귀를 의심했다. 일본 극우 인사들이 주장하는 말 아닌가. 우리나라 신 친일파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말 아닌가.

문 정권의 정책에 대해 그가 비난한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도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문제가 아니다. 미래 세대 나아가 인류 공영을 위해 선진 각국도 채택하고 있는 정책들로 알고 있다. 대선 기자회견이라면 극우의 일방적 시각이 아니라 객관적 진실에 근거해서 논지를 전개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의 거친 언사로 회견문 전체를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정권을 법과 상식을 짓밟는 정권, 기만과 거짓 선동을 일삼는 정권, 소수의 이권 카르텔로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는 정권으로 매도하고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말들은 윤석열 자신에게 더 근친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이와 같은 것을 무기로 검찰 개혁에 저항한 결과가 아닌가.

짐승도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배신만큼 악한 것도 없다. 사람을 배신한 사람은 조직을 배반하기도 쉽다. 나라와 국민까지 배신하지 말란 법 없다. 얼마 전까지 자신이 소속된 정권을 배반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것은 배신의 절정이 아닌가.

정치권의 얄팍한 행태에 국민의 시선이 차갑다. 하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신인을 대통령 후보로 덥썩 받아들일 풍토는 아니지 싶다. 생각과 철학이 같다는 국힘당의 내부 사정도 복잡할 것 같다. 윤석열이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되지는 않을지. 윤석열의 기자회견이 있은 뒤, 여야 대선후보들이 안도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가벼운 무게감으로 인해서다.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몇몇 배반자들의 선동이 통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윤석열이 문재인 정권을 선동 정치한다고 읊조렸다지만 그의 기자회견을 보면 정작 본인이 거친 언어로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국민의 마음을 헝클어놓은 기자회견이었다. 혹평이라고만 할 것인가?

발행인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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