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월요일(11월 2일) 아침은 신선(新鮮)했다. '상쾌했다'는 단어를 쓰려다가 때와 장소를 생각하고 '신선했다'로 수정했다. 사람들도 드물게 보였다. 훤히 뚫린 아스팔트길은 너무 당당한 것 같아 얄밉기까지 했다.
 

옛 이름이 하야로비공원이었지. 공원을 완공하고 문을 열면서 사명대사공원으로 명명되었다. 공원 초입에 자리한 왕옹기(王甕器)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 이 담은 보호의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왕옹기를 떠받들고 있는 두꺼비는 부(富)의 비축자이자 수호자인 양 버티고 있다.
 

가을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건물이 시립박물관. 박물(博物)의 의미는 온갖 물건을 의미하는데, 전제가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을 것. 박물관의 외형(하드 웨어)은 번듯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내부 물건(소프트  웨어)은 태부족인 상태다. 이것을 채워나가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하늘을 향해 죽죽 뻗은 장송(長松). 예부터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는 사람의 기백과 절조를 상징했다. 이 장송을 심은 사람은 의미를 알고 심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김천의 선비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할 것이다. 공원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황악(黃嶽)의 줄기는 가을의 정취를 맘껏 자랑하고 있다.
 

가을의 상징은 단풍이고 단풍은 낙엽과 곧 연결된다. 시내 가로수에서 떨어진 단풍잎은 환경미화원들에 의해 곧 치워지지만 이곳 사명대사공원에는 낙엽을 그대로 두어 가을 정취를 더한다. 이럴 때면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로 시작하는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落葉)'이란 시가 떠오른다.
 

가을 아침에 본 황악(黃嶽)은 이름과는 어긋나게 따뜻하고 친근했다. 황악의 줄기가 맞닿은 골 사이를 수놓은 구름은 마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같다. 황악산도 거느리고 있는 크고 작은 지산(枝山)들을 먹일 조반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황악의 성정을 말하려면 아버지보다 어머니 산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스님이다. 임진왜란 때 왜국에 사신으로 가서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굴복시키고 화친을 맺은 일화는 전설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공원의 상징 5층 석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가옥에는 조선의 멋이 그대로 살아 있다. 팔작지붕의 기와집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이 조선의 멋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오층 목탑과  푸른 하늘, 이것만 보면 가을의 체취를 느끼기 힘들다. 그것의 보완재가 잎은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가을 나무... 필자는 여기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낙엽은 인생의 마지막과 쉬 연결된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베어먼이 그려서 단 담쟁이 잎은 결코 낙엽이 되지 못했지. 그래서 존시의 생명은 되살아나고...
 

대한민국의 목탑 중 가장 높은 공원 5층 목탑. 신라시대 황룡사 9층 목탑이 현존했다면 쌍벽을 이루지 않았을까. 목탑은 일본이 탁월했고, 석탑은 우리가 월등했는데, 김천의 사명대사공원 5층 목탑이 일본을 흠칫 놀라게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김천의 명소 명물 랜드마크로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 같다.

산과 목탑과 단풍나무의 3중주. 강중약(强中弱)을 상징하고 있는 세 가지이다. 산은 자연의 일부로 어떠한 평지풍파에도 끄떡없는 존재요, 가을 나무는 스치는 바람에도 몸의 일부인 잎을 내 주어야 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것을 중재하기 위해 서 있기라도 하듯, 5층 목탑은 그렇다면 중(中)이라고 해도 크게 그릇되지는 않을 터. 이들을 3중주라고 표현한 의미를 알리라.
 

가까운 데에서부터 말하자면 정자와 물레방아와 5층 목탑. 그 어느 것 하나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정자는 사람들의 놀이터요. 물레방아는 백의민족의 식량을 정미(精米)하던 곳이었다. 과거 우리의 젓줄이었던 셈이다. 공원에 자리잡은 대형 물레방아가 작동하면 그야말로 장관일 것이다.
 

순전히 관상용 물레방아지만 가을 풍취와 어우러져 사람의 마음을 건드렸다. 나도향의 단편 '물레방아'에선 신치규가 자기 집 머슴 이방원의 아내를 범한 곳도 물레방앗간이었다. 오직 신치규뿐이었을까. 선남선녀들이 찾아들어 사랑의 불꽃을 피운 곳이 물레방아였다. 그렇다면 물레방아 옆에 헛간이라도 하나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공상을 해 본다.

취재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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