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하루 전 날이다. 마침 주일이어서 예배가 모두 끝나면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다. 이럴 땐 다소 무료하기까지 하다. 보던 책을 펼칠까, 잠을 잘까 아니면 노래를 들을까, 그것도 아니면 쓰던 글을 마무리할까...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닌데 '산 자여 따르라'라는 운동 가요가 흘러나온다. 젊은 여성이 부르는 노래다. 그 애절함에 오금이 저린다. 5.18 전날이어서 더 슬프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원 가사는 백기완 선생이 작시했다. 그 초고를 작가 황석영이 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노랫말은 탁상의 산물이 아니고 시위 현장에서 만들어졌다. 사회를 직시하는 눈과 역사안을 겸비한 사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임을 위한 행진곡' 전반부이다. 여기서 외로이 나부끼는 깃발은 투쟁의 성공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땐 부정적 귀결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투쟁의 선봉에서 스러져 간 동지들로 인해 이 운동 가요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TK 지역의 국회의원 당선자가 스승의 날 하루 전날(5월 14일) 도지사를 찾아가 넙죽 절을 했다는 게 기사화되었다. 옛 스승을 찾아가 인사를 차리는 것을 나무랄 이유는 없다. 도리어 칭찬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른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국회의원 당선자가 도지사를 찾아가 넙죽 절한 내용을 갖고 취재일기 하나를 준비해 놓고 있다. 그 글에도 '깃발'이 나온다.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에 나오는 깃발 심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선거에서의 지역주의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TK 지역은 미래통합당 '깃발'만 꽂아도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다. 정책이나 인물을 보고 표를 던진 게 아니다. 무조건 미래통합당이다. 이건 호남에도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 싹쓸이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 사이에 차가 존재하지 않겠지만 깃발만 꽂아도 당선되는 의원들은 낯춰 보게 된다.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도 있다. 시란 본래 상징 문학이다. 시인의 욕구를 시어(詩語) 깃발을 통해 발산하고 있다. 1936년 <조선문단>을 통해 세상에 선 뵈인 작품이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기승을 부릴 때다. 저항시, 투쟁시를 기대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청마는 태생이 그런 것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다.

시어에 자아를 얹어 세상과 대화하려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학에 혁명, 저항, 투쟁 등의 단어는 버거울 수밖에 없다. 청마의 시집 <청마시초>(1939년),<생명의 서>(1947년)에는 정제된 시어 안에 개인의 욕구 발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청마의 시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시인에게만 허락되는 단어 나열이다. 형용 모순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소리 없는 아우성'이 있을 법이나 한가. 큰 소리가 나지 않는 아우성은 없다. 소리가 없으면 이미 아우성이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표현한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인간의 간절한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이 시에서의 '깃발'을 그래서 평자들은 이상에 대한 동경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방향이 조금 어긋나서 그렇지 시인이자 교육자 청마도 분명 추구하는 이상이 있었다?

여러 나부끼는 깃발 중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는 아무래도 5.18 때 금남로에 휘날리는 깃발이다. 생과 사의 갈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주에 빚지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군의 폭동이니 북한군이 투입되어 벌어진 사건이니 따위의 말을 버젓이 하는 이들이 있다.

역사적 맹아요 잉여인간의 넋두리라 아니 할 수 없다. 역사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지만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없으면 좋겠다.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후반부는 이렇게 끝맺는다.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이명재  lmj2284@hanmail.net

<저작권자 ©김천일보 김천iTV,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