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 때 라면을 먹었다. 직접 끓인 게 아니라 아내가 끓여 준 것이다. 늦장가를 갈 때까지만 해도 마음에 조급증이 일었다. 이이들 결혼이나 시키고 가도 가야 할 텐데... 환갑은 찾아 먹을 수 있을까. 아니, 지금 환갑잔치 생각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눈총 준다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이순(耳順)을 훌쩍 지나고 벌써 그 중간에 와 있다.... 이런 궁상스런 생각이 뇌리를 맴돈다.

라면을 먹을 때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고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닌 그 시절은 나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부모 없는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대부분 궂은 일이었다. 그 중에 내 세울 수 있는 것 하나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가르친 일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비교적 안정된 집안의 아이였다. 과외 선생이었다.

고등학교 남학생이 혼자 살아갈 때 그 어려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어린 나이에 생활 리듬 흐트러지는 것 때문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먹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엄마가 차려 주는 밥도 투정 부리며 억지로 먹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난 잘 했을 것 같다.

그때 나의 주식은 라면이었다. 많이 먹은 탓에 질린 게 라면인데,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잘도 넘어 가는 것이 또한 라면이었다. 고학생에게 라면이 주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적은 돈으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다. 끓여 만들기 쉽고 또 장만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다 면발이 먹기도 편하다. 후후 숨을 내쉬면서 빨아들이면 술술 잘도 넘어간다.

 주로 맨 라면을 끊여 먹지만 가끔 그 틀을 벗어날 때가 있었다. 자주가 아니라 그야말로 종종 있는 일인데 호주머니에 여유가 조금 있을 때가 그랬다. 그럴 때면 별미를 준비한답시고 시장 통에 가서 이것저것 라면에 넣을 재료를 산다. 풋고추 당근 콩나물 등의 야채와 계란 멸치 참치 통조림 등이다. 여기에 가끔 꼴뚜기까지 등장하면 천하일미가 된다.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맨 라면만 끓여 먹다가 야채 건어물 등을 부수적으로 넣은 라면은 고학생에게 별미이자 특식의 식탁으로 바꿔 놓는다. 여기에 김치가 반찬으로 상에 올려지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고춧가루가 있을 때 넣으면 얼큰하기가 짬뽕 맛 뒤지지 않다. 더한 라면도 있다. 다음은 내가 끓인 라면 중 최고의 것이다.

일명 꼴뚜기탕으로 불렀다. 라면에 야채와 계란 멸치를 넣고 마지막으로 꼴뚜기를 넣어 끓인다. 꼴뚜기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어패류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속담의 그 주인공이다. 이것을 물에 살짝 씻어서 라면에 넣으면 시커먼 먹물이 나와 보기는 좀 그렇지만 걸쭉한 맛은 가히 라면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우리 반 내 짝꿍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부모의 지극한 돌봄 속에 고생 모르고 생활하던 그가 짝인 나의 고학 생활을 신기한 듯 물어오곤 했다. 한 번은 우리 집(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함)에 놀러 오고 싶어 했다. 그와 약속한 날 밀린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치우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최고급 꼴뚜기탕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라면은커녕 상 위에 수저도 놓아 본 적이 없는 그 친구가 그날 나의 모습을 몹시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도와주겠다는 그를 방에 앉혀 두고 미리 장만해 둔 재료로 꼴뚜기탕을 끓였다. 내가 보기에도 최상의 요리가 되어 나왔다.

친구는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었다. 엄마가 끓여 주는 라면을 친구는 저렇게 맛있게 먹었을까. 친구는 지금도 그 때의 꼴뚜기탕 이야기를 한다. 라면에 관해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또 있다. 50 여 년 전의 이야기가 되니까 이 분은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 정문 앞에 문방구가 하나 있었다.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문구류뿐 아니라 한 쪽에 테이블을 놓고 라면과 김밥, 떡볶이 등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팔았다. 식욕이 왕성할 때의 아이들이어서 등하교 시간과 점심시간에 몰려가 문구점 아주머니가 마련해 준 음식들을 잘도 사 먹었다. 그때 아주머니는 50 중반쯤의 연세였 다. 아침 식사 거르기를 밥 먹듯 하던 나는 문구점에 들려 라면을 사 먹곤 했다.

그런데 라면 하나로 성에 차지 않았다. 한창 먹을 나이가 아닌가. 어느 날 아침, 주위에 친구들이 없는 틈을 타 아주머니에게 진지하게 나의 생각을 말했다. 수줍음을 많이 타던 아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발동했는지 모르겠다. 그 아주머니도 나의 고학생활을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주머니, 죄송한 말씀인데요... 제가 등굣길에 이곳에서 라면을 자주 사 먹잖아요... 제가 맨 라면을 하나 가지고 오면 그것을 넣어 끓여 주시면 안 돼요?"

글로 옮겨 적으니 이렇게 매끄럽지 나는 뜨덤뜨덤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되다 말다... 라면 하나로 양이 안 차지?"

아주머니는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어린 학생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물씬 풍겼다. 대화를 정리하면 이렇다. 문구점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라면 값이 50원이다. 두 개를 끓이면 100원이 된다. 생 라면 하나의 값이 20 원 할 때니까 70원으로 100원(라면 두 개) 가치의 라면을 먹은 것이 된다. 고학생이 짜낸 지혜(?)였다.

그 뒤, 아주머니는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가끔 라면에 계란을 넣어주기도 하고 공깃밥을 테이블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기도 했다. 내 삶에 은인인 셈이다. '라면' 이야기를 돌이킬 때면 꼭 떠올리는 고마운 그분을 졸업하고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나의 생활이 팍팍해서였겠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 아내가 끓여 준 라면을 '맛있게' 잘 먹었다. 이른바 '라면 박사'라고 하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음식 매니아들에겐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 자신이 만든 것보다 더 맛있게 여겨질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 짝꿍이었던 친구가 먹은 내 꼴뚜기탕도 그와 유사할 것이다. 또 아내가 끓어 준 라면도 내겐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농촌 생활이라는 게 풍족을 구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없는 가운데 자족할 수는 있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이런 것이지 싶다. 청소년기 주식이다시피 했던 라면을 지금은 식사 대용 또는 간식으로 가끔 먹는다. 이런 삶 가운데에서도 소박한 정과 사랑을 나누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 농촌은 마음을 내려놓은 사람만이 발 딛고 살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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