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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익 칼럼] 선거-사라진 민주주의를 찾아라장성익(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작가)
장성익 | 승인 2020.03.23 23:20
장성익(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작가)

총선을 앞두고 거대 기득권 정당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마구 짓밟고 있다. 그 꼴을 보자니 새삼 선거라는 것의 본질을 되새기게 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선거란 애초부터 소수 엘리트를 뽑아 이들의 손에 권력을 넘겨주던 장치였다. 시민혁명이라 불리는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일반 민중에게 권력을 맡기면 나라가 엉망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대신에 똑똑하고 선택 받은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잡아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고안해낸 것이 선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의제 시스템이다. 선거 중심 대의민주주의의 바탕에는 선거로 선출된 엘리트 대표들은 평범한 민중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우월하고 고귀하고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선거를 뜻하는 영어 단어 elect와 ‘뛰어나고 구별된 소수 정예’를 가리키는 엘리트(elite)라는 말의 어원이 같은 것은 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처럼 선거가 처음 도입되고 보편적인 제도로 확산된 배경에는 민주주의로 인한 사회 혼란이나 민중 소요를 막으려는 지배세력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시민혁명 주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민주주의를 혼란, 무질서, 가난한 자들의 난폭한 정치, 극단적인 유토피아, 불안정한 무정부 상태 등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법률가, 토지 소유주, 공장 소유주, 사업가 등이었다. 미국의 경우는 노예를 부리는 농장 소유주도 많았다. 

부유한 이들 부르주아 엘리트는 봉건적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왕이나 특권 귀족계급을 없애고 싶어 했다. 그리고 권력의 주인이 민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민중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기들이야말로 능력을 갖춘 엘리트로서 민중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머릿속에 그렸던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주인이 되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라기보다는 소수 엘리트 특권 체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을 이루는 데 아주 쓸모가 많았던 게 바로 선거였다. 모두가 가져야 할 권력을 특별한 소수 엘리트 집단에게 넘겨 통치를 위임해야 한다는 게 선거에 담긴 핵심 논리이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에서 시민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투표권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에게만 주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이 높이 평가하는 미국혁명만 봐도 그렇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보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피통치자의 동의’(영어 원문으로는 ‘the consent of the governed’)라는 표현이다. ‘통치를 받는 자’의 ‘동의’를 권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일반 시민이 권력에 참여하는 방법은 ‘동의’뿐이라는 얘기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를 나누고 다스림을 받는 자, 곧 피통치자에게 주어진 권한은 다스리는 자, 곧 통치자에 동의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 동의의 방식이자 절차가 곧 선거다. 미국 헌법을 제정한 미국혁명 주도자들은 ‘인민주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일반 시민을 피통치자로 규정하면서 인민의 위상을 낮추려고 했다.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한 선거가 과연 절대다수 유권자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일까? 권력이나 부와는 동떨어진 약자와 소수자의 이해관계를 온전히 대변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겠다.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실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선거에 참여해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투표를 할 때, 우리는 주어진 선택지 이외의 답을 고를 수 없다. 유권자에게 그런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투표용지에 적혀 있는 기존 정당이나 정치인을 찍을 수밖에 없다. 싫어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표로 ‘심판’하려면 딱히 지지하지도 않는 다른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할 때도 많다. 이것이 지금의 선거 시스템이요 대의민주주의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선거는 ‘주관식 시험’이 아니라 ‘객관식 시험’이다. 주어진 답 안에서만 정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를 풍요롭게 살찌울 수많은 정치적 상상력과 가능성이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지금의 체코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은 정치를 ‘불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특히 기존의 주류 상식이나 고정관념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이루어내는 예술이 진정한 정치라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는 정치를 실현하는 데에도, 예술을 구현하는 데에도 모두 실패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졸저 <사라진 민주주의를 찾아라>(풀빛, 2018)에 실려 있는 선거 관련 대목을 간추려본 것이다. 몇 년 전에 썼던 글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심사가 참 씁쓸하다.

장성익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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