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일(목원대 명예교수, 수필가)

동양인들이 자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언급하듯이 서양 사람들도 'Naked we come into this world and naked we should go(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동서양의 글귀가 모두 ’인생이 덧없다‘는 말일 터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욕구 세 가지가 있다. 소유욕, 권력욕, 그리고 명예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욕구에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탐(貪)해야 하고 심한 경우에는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현세적인 욕구를 추구하며 살다가 허무하게 빈손으로 떠나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평생 동안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을 외면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적인 욕구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살면서 인류역사에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남기기 위해 평생을 바치며 살다가 가신 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나라 근세사에서 그렇게 살다 가신 분은 어느 분이실까?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 흘리며 고생하다가 순국하신 분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살다가 간 분으로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柳一韓, 1895~1971)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평양 출생으로 만 아홉 살이 되던 1904년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시건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1926년에 제약 업체인 유한양행을 설립하였고 1962년에는 유한 학원을 설립하였다.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1969년 주주총회 석상에서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사장직을 자신의 외아들이 아니라,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유한양행의 조권순(趙權順, 1920~2010) 전무에게 물려주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재 1,500여명의 임직원 중, 유일한 박사의 친인척은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1971년 3월,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유언의 내용은 편지지 한 장에 손으로 적은 글씨로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①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0,000 달러를 준다. ②딸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주겠으니 그 땅을 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며 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라. ③내 소유의 주식은 전부 사회에 기증한다. ④아내는 딸이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⑤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 기증하라."고 유언으로 남겼으며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경기도 부천시에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국도 6km에 걸쳐 유 선생을 기리는 《유일한로(柳一韓路)》가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빈손으로 떠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새삼스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유일한 선생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행복과 보람 있는 삶을 선물로 주고 갔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사회에는 젊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영재교육에 대단한 열을 올리고 있다. 진정으로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공부도 잘해야 하지만 정서적인 안정이 더욱 중요하고 또 그 위에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인류역사상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무너진 사람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행복하게 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삼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위에 기록한 내용은 2년 전, 《KBS 아침마당》에서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던 연세대학교 철학과 김형석(金亨錫, 1920~ ) 명예교수의 강의를 TV로 시청, 그 내용을 요약, 정리, 편집한 것이다. 당시 96세의 김 교수께서는 60분 동안 꼿꼿이 서서 전혀 피로의 기색도 없이 웃는 표정으로 일관하여 강의를 마쳤다. 여성사회자가 묻는다. “교수님의 그 놀라운 건강유지의 비결이 무어세요?” “남들이 그래요. 김 교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하며 웃기만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은 주어진 삶을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문정일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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