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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약산김원봉기념사업회 출범에 붙여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편집부 | 승인 2019.11.10 21:24
이만열 박사(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상지대 이사장)

어제(11월 9일) 오후 3시 성공회대학교 피츠버그홀에서 ‘의열단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강당 안의 250석도 모자라 이곳저곳에 서서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다. 여는 공연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의 대역을 자처한 원영애 님(극단 독립극장 대표)은 만장한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그의 감동적인 호소는 많은 청중들의 심금을 울려 눈물을 훔치게 했다.  

이어서 중국에서 활동할 때의 약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의용대원들을 모아놓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이어서 오래 전에 약산의 행적을 살피며 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일일이 찾아 다큐멘타리를 만든 도올 김용옥의 “도올, 약산을 그리다”라는 기념강연이 있었다.

도올은 강연에서 약산을 두고 “머리가 뛰어났고 매우 수려한 미남이며, 리더십이 출중한 분”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약산이 자기가 설립한 조선의용대와 같이 중국 공산당 쪽으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택하게 되는 경위와, 태항산 쪽으로 갔던 조선의용대가 결국 김무정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또 약산이 임정 환국 때에 제 1진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2진으로 들어와 국내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한 발 늦었다는 것과 귀국 후 모멸과 위협 속에서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북행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약산 김원봉(1898.9.28 음력 8.13∼1958?) 선생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서울 중앙학교와 1916년 이후에는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과 남경의 금릉대학에서 수학했다. 1919년에는 몇 달간 신흥무관학교에 적(籍)을 두었었고, 그 해 11월 10일 동지들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조직, 그 단장으로 활동했다.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부산경찰서 투탄사건’ 일본육군대장 ‘다나카(田中) 암살미수사건’, 1924년 ‘니쥬바시(二重橋) 투탄사건’, ‘김상옥 열사의 의거’ 등은 그가 이끄는 의열단원들에 의해 감행되었다. 그는 1926년 황포군관학교 제 4기생으로 졸업, 중국 군관으로 활동하면서 중국인 지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독립운동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약산 김원봉 선생  News1 이철우 기자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활동지를 남경으로 옮기고, 1932년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워 윤세주·이육사·정율성 등 125명을 양성했다. 그 뒤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받아 강서성 성자현 소재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조선인 청년 90여명을 파견, 정치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이듬해 10월에는 이들 군관학교 졸업생 등을 규합하여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 그 대장에 취임했다. 무한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1939년 광서성 계림으로 옮겼다가 1940년 3월에는 조선의용대 본부 94명과 함께 중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다수의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화북성 연안으로 이동, 김두봉·최창익·김무정·한빈과 함께 조선의용군 및 조선독립동맹을 성립시켰다.  

중경으로 이동한 약산은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했고, 이어서 그 해 12월에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참여,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약산은 광복군 1개 분대를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하는 데도 관여했으며,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 군무부장을 맡았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에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 각 정파의 통일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힘써 공동의장이 되어 여운형 등과 뜻을 같이했고, 여운형이 피살되자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 및 미군정의 위협을 받고 해방된 조국에서 감옥과도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1958년경에 거기서도 사라졌다.

 그 동안 그의 독립유공자로서의 서훈 문제가 검토되어 왔다. 그의 독립운동은 일제가 내세운 현상금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되어 있는데 이는 분단체제 때문이다.

현재 독립운동자 서훈에 관한 법률인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이 법률에 의해 ‘건국 훈장’을 수여토록 되어 있고, 심사규정에는 북한정권 수립에 관여하면 독립운동 공적이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서훈이 금지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분단체제 하에서 국내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심사규정을 고치거나 특별법을 만들어 그에게 서훈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많은 선열들을 기억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해방 독립을 떳떳하게 맞을 수 있었고, 민족사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남·북에서 독립유공자, 혁명열사 또는 애국열사로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약산과 같이 남북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선열들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민족독립운동사에 남긴 혁혁한 공훈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 때문에 아직도 남북 어디에서도 이들 숭고한 고혼들이 안식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홀대받는 이들 독립유공자들을 선양하는 것이 남북정부에 의해서는 당분간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을 기억 선양하는 방법은 민간 차원에서, 분단체제를 넘어서서 접근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마저 불가능했다.

오늘 우리가 약산 선생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는 것은 분단체제 하에서 남북한 어디에서도 그들의 민족적 업적을 기리지도, 고혼을 모시지도 않는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하고자 함이다. 분단체제 아래서도 그들의 불멸의 공적을 민족사에 안착시키고자 함이다.

남북한 정부가 하지 않는 이 사업을 민간인들이 뜻을 모아 수행하려고 한다. 약산선생기념사업회 결성이 기연(機緣)이 되어 남북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에게 안식처가 제공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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