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일 교수(목원대학교 명예교수, 수필가)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는 이곳 ‘서대전 공원’에서 지난해 여름 한 젊은 노숙인(露宿人)을 발견했다. 이 젊은이는 밤새도록 무엇을 하는지 날이 밝기 시작하면 공원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벤치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하루 종일 잠을 자곤 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그 젊은이가 지하도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상자조각을 앞에 놓고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어느 오후 시간에 그가 잠이 깬 상태로 나무 그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내가 유심히 살펴보니 자네는 일은 하지 않는가 보군.” “네.” “자네 무얼 먹고 지내나?” “돈이 생기면 라면이라도 먹고 없으면 그냥 지냅니다.” “내가 보니 자네는 건강해 보이고 게다가 한창 나이인데 일을 하지 그래? 내가 자네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네. 자네 지금 몇 살인가?” “서른 살입니다.” ”주민 등록증 가지고 있나?“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는데 다시 발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신청을 하면 되지. 자네 혹시 전과(前科)가 있나?“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얼버무린다. ”전과가 있어도 괜찮아. 내가 자네의 임시보호자가 되어 줄 테니 나하고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면 되지. 자네가 일자리를 잡을 때까지 자네가 굶지 않도록 도와줄게. 전과가 있다 하더라도 자수하면 벌이 그리 무겁지 않을 거야. 정해진 벌을 받고 주민등록증을 받도록 하게나.“

(시종 고개를 숙인 그 청년을 바라보니 그의 오른쪽 눈이 조금 이상해 보인다.) ”자네 오른쪽 눈이 불편한가?“ ”네. 실명했습니다.“ ”왼쪽 눈은 정상이지?“ ”네.“ ”팔 다리를 못 쓰는 사람도 일을 하는데 한쪽 눈 실명한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네. 나는 평생 선생님을 한 사람이야. 정말 자네를 돕고 싶어서 자네에게 말을 시키는 거라네.“ (명함 한 장을 그에게 내밀며) “자네가 오늘 확답을 하지 않아도 좋아. 언제고 전화해도 좋고 오늘처럼 아침저녁으로 공원에 산보하러 나오니까 언제 건 내게 자네 생각을 말하게. 너무 시간을 오래 끌지는 말구. 자네 성씨는 뭔가?“ ”김가입니다.“ (그에게 라면이라도 사먹으라고 5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고 헤어졌다.)

그를 만난 지 달포가 지나도록 그가 눈에 띄지 않더니 어느 날 그 젊은이가 나무그늘 벤치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귀찮아할는지 모르지만 돕고 싶은 생각에서 그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김군, 잠을 깨워 미안해. 자네에게서 연락이 오나 하고 기다렸어. 지난번에 내가 자네에게 한 말 생각 좀 해 보았나? 내가 임시 보호자가 되어줄 테니 자네의 생각을 말해 봐.” ”있잖아요. 전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전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젊은이의 얼굴을 보니 모두 귀찮고 성가시다는 표정이다. 그 후로도 이따금 나무그늘 벤치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그를 보았으나 더 이상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한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려면 특정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무책임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낙오하게 마련이다. ‘책임’을 영어로는 ‘responsibility’라고 한다. 이 단어는 ‘response(반응)’라는 말과 ‘ability(능력)’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책임’이라는 말을 풀어 말하면 (특정한 자극에 대해) “그것에 상응(相應)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외부의 자극이 오면 자연스럽게 그 자극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나타내게 마련이다. 따라서 만일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말은 이미 삶의 의욕을 포기했다는 말이 된다.

우리말 속담에 “사흘 구걸한 거지는 평생 그 버릇을 고치지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구걸로 삶을 지탱하다 보면 구걸의 안일함에 빠지기 쉽다는 교훈을 말해주는 옛말일 터이다. 위에서 언급한 젊은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극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이 보인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그 젊은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 젊은이를 방관한 이 사회에도 전혀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정일 교수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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