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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익 칼럼] 죽음을 맞이하는 또 다른 방식: 스코트 니어링장성익(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장성익 | 승인 2019.06.13 15:40

이희호 여사가 돌아가셨다. 나는 고인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보다는 선구적인 여성운동가, 열성적인 평화 전도사, 강건한 민주화 투사로 더 소중하게 기억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새삼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죽음 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스코트 니어링이다. 스코트 니어링(1883-1983)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문제점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실천했던 미국의 문명비평가다.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펼치면서 시골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살았던 비판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100살까지 장수를 누리며 살다가 1983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생전에 유언처럼 남긴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해준다. 

그는 죽음을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자,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런 생각에 따라 그는 스스로 단식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먹지 않음으로써, 즉 굶음으로써 서서히 죽어가는 길을 선택한 것. 그에게 죽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게 아니었다.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인간의 위엄을 잃지 않고서, 스스로 죽음의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그랬던 것은 죽음의 과정을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예민하게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는 맑은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했고, 품위 있고 평화롭게 육신의 옷을 벗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면서도 인공적인 의료적 치료나 조치, 이를테면 수명 연장을 위한 약물 주입, 산소 호흡, 심장 충격 같은 것들을 모두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랐고, 병원이 아닌 자기 집에서 고요하게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 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가거나 깨어나는 것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그에게 죽음이란 나쁘고 부정적인 것, 피하고 미루고 멀리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삶이 충만했듯이 죽음 또한 충만하기를 소망했다. 그에게 죽음이란 인생이 끝장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차원 혹은 단계로 자신의 존재가 옮겨가고 새롭게 깨어나는 것이었다. “기쁘게 살았으니 기쁘게 떠나리라.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떠난다.” 그가 생전에 즐겨 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1983년 8월 어느 날 아침, 사랑하는 아내 헬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원하던 방식대로 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며 헬렌은 이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그냥 두세요. 썰물처럼 흘러가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했고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그는 그렇게 마른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조용히 숨을 멈추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는 듯이 “좋―아”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순간 헬렌 또한 그가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로 옮겨 갔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어김없이 닥쳐오지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는 듯하다. 죽음을 꼭 ‘생명의 끝’이나 ‘삶의 부정’으로 여길 필요가 있을까? 

생명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번지고 스민다. 서로 겹치고 맞물리는 게 삶과 죽음의 관계다. 좋은 삶이 아름다운 죽음을 빚어낸다. 훌륭한 삶의 갈무리가 곧 멋진 죽음이다. 

그래서일까. 높은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삶의 절정이자 마지막에 피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모든 존재는 죽음으로 자신을 새롭게 한다.”

물론 죽음은 슬픈 것이다. 어찌할 수 없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때로는 아주 무섭고 두렵기도 하리라. 하지만 죽음은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해 주고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으로 이끌어 주는 뜻 깊은 계기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삶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은 얘기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것, 삶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건지도 모른다. 잘 살아야 잘 죽고, 잘 죽어야 잘 산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황현산 선생은 생전에 ‘소금과 죽음’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성익 소장(환경과생명연구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장성익  gcilbonews@daum.net

장성익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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