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隨想)] '또' 설이 지나가고 있다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또 설 명절이다. 접속어 '또'를 앞에 붙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빠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동일한 세월의 경과도 나이에 따라 느끼는 속도감이 다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비례 관계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10대는 시속 10 km, 20대는 시속 20 km....60대는 시속 60 km, 70대는 시속 70 km.... 정말 그런 것 같다. '또'라는 접속어를 쓴 이유다.

인생은 60부터라고 말들 하지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다. 환갑이 지나면 정신과 육체의 힘이 급격히 떨어진다. 노쇠현상이 고개를 치든다. 긴 세월의 이끼로 마음의 순수함도 많이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몇 개의 단어는 신성불가침이다. 그 안에 설날이 포함된다. '까치'가 붙어 '까치설날'이 되면 동심의 확장성은 더욱 커진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하는 동요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설날' 했을 때 떠오르는 단어는?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다. 떡국, 세뱃돈, 귀성객, 고향, 윷놀이... . 그런데 나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한과'가 떠오른다. 그것에 얽혀 있는 좋지 못한 경험 때문이리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한참 전일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요즘과는 달리 그 당시엔 설 명절 때 쓸 한과를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설은 한과 만드는 명절로 각인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어머니는 한과 만드는 장인(匠人)이었다. 요즘 백화점에 나오는 고급 한과도 어머니가 만든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한과 공장을 하시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민다. 손바닥 크기만 하게 빚어 그것을 양약의 캡슐 크기로 잘게 자른다. 그 다음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펼쳐 놓고 말린다. 바싹 마르기까지 4,5일쯤 소요되었던 것 같다.

마른 조각들을 들기름에 튀기면 2,3십 배 크기로 불어난다. 그것에 조청(엿기름)을 묻힌 다음 빨주노초 색상으로 물들인 쌀가루를 덧쒸우면 한과가 완성된다. 이것을 여러 그릇에 담아 이웃과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해, 사달은 조각을 내어 방바닥에서 말릴 때 벌어졌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꼬맹이도 엄마 손을 덜어드릴 요량으로 왔다 갔다 하며 번잡을 떨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나의 모습에 어머니는 몹시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땅따먹기 놀이를 하듯 말리는 쌀 조각 빈틈을 요리 조리 깡충거리다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 벽에 걸려 있는 등잔을 쳐서 석유를 쏟은 것이다. 석유는 고스란히 늘려 있는 쌀 조각 위에 수놓인 듯 뿌려졌다.

어머니가 쌓으려던 공든 탑이 무너진 셈이 되고 말았다. 재를 저지른 나에게 어머니는 한 말씀도 안 하셨다. 대신 쌀 조각을 모두 수거해 샘물로 몇 번이나 석유를 씻어냈다. 한과 모양은 하고 있었지만 맛은 영 아니었다.

요즘도 한과를 볼 때마다 60 여 년 전의 그 장면이 어른거린다. 아무 말 없이 석유 묻은 쌀 조각을 씻어내는 어머니의 얼굴도 오버랩된다. 어머니에 대한 송구함도 스멀스멀 일어난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인데도... .

얼마 전, 고향 친구들이 밴드를 만들어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왔다. 개인 사업을 하는 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활 전선에서 물러앉아 있었다.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니 어릴 때 모습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산행 등 취미 활동을 하고, 그 중 형편이 좀 나은 친구들은 가까운 이웃나라 여행도 다니는 것 같았다. 이번 설에 고향을 방문하려 한다. 나를 낳고 길러 준 터전인 동네도 둘러보고 뒷산에 올라 '야호~'를 외쳐보고도 싶다.

개발로 고향 집이 헐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흔적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川)와 신장로를 나누어 주던 긴 대나무 밭과 2백 년 수령의 정자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소꿉장난하던 마을 어귀 큰 반석도 변함이 없겠지.

부모님 산소를 찾지 못한 지가 꽤 되었다. 앞 산 양지바른 곳, 부모님 유택(幽宅)을 찾아 그동안의 불효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다. 이래저래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 것을 보니 많은 설을 지냈나 보다. ‘또’ 설이 지나가고 있다.

발행인 lmj228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