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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연의 김천 문화유산 답사 – 김천의 독립운동가를 찾아 ①묘지 없는 위대한 영웅 편강렬(片康烈) 의사(義士)문상연(전 김천시보건소 소장)
문상연 | 승인 2019.01.11 00:55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출범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깊이 인식하지 못했던 애국선열의 업적과 그 고귀한 뜻을 기리면서 불굴의 열정으로 순국하신 우리고장 항일 독립운동가의 나라사랑 사적지를 탐방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대상자 선정을 위하여 국가에서 공적과 업적을 표창하기 위해 주는 영전의 하나로 훈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무궁화대훈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훈장이 있는데, 국민과 민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선열들께 헌정이 되는 훈장은 건국훈장으로 5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전국에서 포상인원은 총 10,795명(2017.12.31. 현재)으로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24명, 애국장 4264명, 애족장 5584명입니다. 그중 우리 김천에서 독립유공자에 추서되신 분은 모두 56명입니다. 대한민국장 1명, 대통령장 1명, 독립장 3명, 애국장 8명, 애족장 24명입니다. 이분들로 인하여 우리고장의 역사적 전통과 자부심이 느낍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훈장을 받으신 분과 받지 못한 분들 중에서도 김천지역과 김천인의 긍지로 독립운동을 펼치신 훌륭한 유공자들이 더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한정된 4명을 임의로 선정한 답사임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김천시에 연고를 두시고 3등급 이상의 훈장에 추서되신 애사(愛史) 편강렬, 일괴(一槐) 이명균(李明均), 이건석(李建奭) 선열 세 분에 대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구미에서 태어나셨지만 우리 김천에서 많은 발자취를 남기신 왕산 허위 우국지사를 포함해서 네 분에 대해 존숭하는 마음으로 나라사랑의 글을 올리겠습니다.  

(*애사愛史 편강렬片康烈 1892.02.28.~1929.01.16.)

양양洋洋한 압록강수水는 
밤낮으로 흘러가는 곳 어데이뇨
유유悠悠한 나의 심사心思 
너를 따라 거지업다.
흘립천장屹立千丈 높히서기 깊흔 담장안 너 그리워 탄식하는 너의 넷 주인主人 
나를 네  보느냐
창공에 밝아있는 저 명월明月 
아~누구를 위하여서
교교皎皎히 빗치였는 철장에 
깊흔 한恨은 망국혼이 늑기워라
언제나 언제나 붉은 담 붉은 옷 버서나 사랑하는 너를 질길소냐?
(*신의주 옥중에서 열사가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아버지 편상훈(좌측)과 의사 편강렬)

편 의사는 절강 편 씨입니다. 열사의 선대는 김천이 본거지로서 어모면 다남4리 오청계마을과 다남2리 참나무골(진목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헌죽리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버지 편상훈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한 체구에 힘이 장사였다고 하며 아호는 애사(愛史)입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편 의사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선봉장으로 참전하였습니다. 경상, 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1908년 서울 진공작전에서 분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태백산 본진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중 큰형(편수열)의 권고로 고향으로 귀가하였습니다.

(*105인 사건 주요인물 - 상단 오른쪽 3번째가 의사 편강렬)

귀향 후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일제가 날조한 소위 105인 사건(테라우치 마사다케, 寺內正毅 총독 암살 모의)에 연루되어 2년여 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세 나이에 고문을 받은 횟수가 36회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평생 열사가 받은 고문의 총량과 고통은 엄청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열사의 높은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대한 광복회에 가입하여 결사대와 선전반을 조직하여 맹렬하게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선생의 이러한 굳은 뜻은 의병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의병이란 바로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精粹)입니다.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의병과 의병정신은 신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은 평민들을 괴롭히는 극히 일부의 의병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는 냉엄함도 보였습니다.

1914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선대의 고향인 김천 다남리 진목마을로 돌아와 은거했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선생은 서당을 개설하고 어모면과 개령, 감문면 청소년들을 모아 강학(講學)을 했을 뿐 아니라 황악산 자락 삼성암(三聖庵)에서 무술을 연마시키기까지 했습니다.

1919년 3월1일을 기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뒤따랐습니다. 가을에는 황해도 안악에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을 조직하여 안악군 대표를 맡아 활동했습니다. 이때 밀정의 신고로 체포되어 징역 1년2월의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혹독한 감옥살이 끝에 병을 얻은 열사는 1921년에 출옥하여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진 뒤였습니다. 가문의 모든 재산은 일제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열사는 분노와 울분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독립군단 주요인물 - 하단 오른쪽 다섯 번째가 의사 편강렬)

북경과 상해 등지를  진전하며 동지들과 조국광복의 방략을 논의하였지만 무장 항쟁이 최선의 방략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하였습니다.

(*의성단義成團 활동 신문기사."의열단의 침입에 전후하야 의성단  침입 정보가 도달하였음으로 경무 당국은 대경실색하야 어젓줄 모르는 판인데...."라는 신문보도가 당시 일제의 공포감을 알리고 있다.)

그 후 1923년 10월경  산해관에서 의성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장춘선 공주령으로부터 장춘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양측 2백여 리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250명의 단원을 무장시켰습니다.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을 위한 것입니다. 1924년 장춘성 내의 안중근, 이육사 외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였습니다.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독립군을 통합해서 일제와 싸워 동경에 조선인 총독을 두겠다는 편강렬 의사의 최후 진술을 보도한 신문기사)

1924년 8월 하얼빈으로 가서 각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를 조직하려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일경과 장시간 총격전 끝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 열린 공판에서 최후 진술로 "나는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고 말했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1925년 3월30일 징역 7년의 판결 언도가 있었습니다. 이 재판정에서도 열사는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의연하게 돌아서 재판관과 방청객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의성단장 편강렬 苦境 병든몸 고칠 여망업서', 동아일보 1928.09.08)

2년 이상을 신의주 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릴 대로 시달린 선생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하여도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1929년 1월16일 열사는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 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 "는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뜨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무덤에 '愛史(애사) 片康烈之墓(편강렬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고 하지만, 무덤도 비석도 지금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중국에서 한국인 무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편강렬의 이름을 기억하는 후손조차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용맹하고 헌신적이었던 독립투사, 의성단 단장 편강렬, 자유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이름이다."(아이틴 뉴스 2015.09.01.)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고장 남산공원에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절강 편 씨 집성촌에서 편 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1980년 광복절을 기해 여러 층의 기단 위에 세운 비석으로 비각으로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강화도 평화전망대에도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이북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웠다고 합니다.

지인 편정근 씨의 소개로 열사의 11촌 친척(편재관, 72세, 다남4리 노인회장, 前 김천시 초대시의원, 경북 김천 포도협회장)을 만나 오래된 자료를 제공받았습니다. 또한 절강 편 씨 문중사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하였습니다.

편강렬 열사 순국기념비 옆에 남은(南隱) 여중룡(呂中龍)(1856~1909, 독립운동가, 구성면 금평리 출생, 국립묘지 안장,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열사  순충비(왼쪽)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광복70주년 기념 ‘김천항일독립운동사’(김천시, 2015), ‘지명을 품은 한국사 3’(이은식, 2011), 동아일보, 서울신문, 매일신문, 김천신문, 한韓문화타임즈, 아이틴 뉴스, 뉴시스, 다음블로그(써니) 외.

사진작가 김규호 안은미 ‘동박새’ 사진.

문상연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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