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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남재희의 <언론ㆍ정치 풍속사>-'나의 문주(文酒) 40년']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발행인 | 승인 2018.12.23 21:52
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부제를 이렇게 달고 있다 '나의 문주(文酒) 40년' 글쟁이가 술을 매개로 엮어낸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소싯적 양주동의 <문주 반생기>를 읽고 그의 호방한 성격과 인문학에 대한 즐거움을  누렸던 적이 있다. 남재희의 것은 사회의 깊숙한 곳을 살필 수 있어서 좋다.

현진건은 그의 단편 '술 권하는 사회'에서 답답하게 돌아가는 이 사회가 술을 마시게 한다라고 풍자했지만 여하튼 술이 순간적인 감정 해소용으로는 유용한 듯하다. 애주가들은 사람 관계를 돈독케 하는 데는 술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감정의 응어리도 한 잔 술로 날려버릴 수 있다.

남재희도 애주가다. 그가 책 표지에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였듯이 "20년간 언론인으로, 20년간 정치인으로 한국 현대사와 어깨를 나란히 해온 필자는...대폿집에서 고급 살롱까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내밀하고 진실 된 고백, 교유, 일화, 비망록 들을 담았다"고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글쟁이 남재희의 경험을 통해 소개되는 한국 현대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남재희' 하면 세 가지가 부럽다. 첫째는 다독(多讀)과 다 경험의 결과에서 나오는 비단결 같은 글이고, 둘째는 자칭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그가 갖고 있는 균형 잡힌 눈이 부럽다.

셋째는 범부(凡夫)에서 소위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의 교유 폭이 부럽다. 거기에 한 잔 술이 곁들이면 바로 이야기로 꽃 피고 그것은 한 편의 글로 생산된다. 기자의 속도감이 즉발적(卽發的)으로 발휘되는 셈이다. 그는 저널리스트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아카데믹 영역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글에 무게감이 있다는 말이다.

서재 깊숙이 꽂혀 있는 남재희의 책을 찾아 다시 읽어 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아니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학문까지도 진영 논리에 갇혀 신음하는 현실이 남재희의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와 진리 그리고 평화와 심지어 사랑까지도 진영논리의 하위 개념으로 치부된다.

역사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며 상호 보완하는 관계로 발전해 왔다. 즉 보수와 진보는 역사 발전의 양 축이다. 이 둘의 관계를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떨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양 극단의 너무 나가버린 진영이 보수와 진보를 참칭하며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고 있지 않은가.

진보가 대화하고 싶어 하는 보수 인사, 역으로 보수가 대화하고 싶어 하는 진보 인사가 많을 때 사회의 건강성이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남재희는 진보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보수 인사다. 그러니까 건전한 보수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남재희의 책 중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다시 손에 잡은 이유를 눈치 챘으리라.

남재희 지음 <언론 정치 풍속사>(민음사, 2004년 9월 출판)



이 책은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으로 출판할 목적으로 쓴 글들이 아니고 여러 매체의 부탁을 받고 또는 기고해서 활자화한 것들이어서 모은 각 부의 글들이 성격에 꼭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술집에서 나눈 이야기를 묶어 1부로(생활 풍습의 중요한 한 단면), 특히 술과 관련 있는 여성들을 묶어 2부로(현대의 황진이들), 이런 식이다.

놀라운 것은 쓸데 없는 사람이 포함되지도 않았고 쓸데 있는 사람이 빠지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여기서 남재희의 소재 선택의 탁월함과 글쓰기의 뛰어남이 드러난다. 이건 글쟁이의 지적 넓이에다 고도의 테크닉이 어우러질 때 가능하다. 이것도 또한 부럽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책이 나오기까지'만 봐도 사람의 다양성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다산(茶山) 연구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박석무, 강서문인협회 회장 이은성, 아동문학가 김종상... 민음사 사장 박맹호, '한겨레 그림판'의 박재동. 그는 프롤로그에서 "술 마시는 것도 문화다"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책의 내용을 획정해 주는 구호라 할 수 있겠다.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공으로 기술된 사람만 해도 대충 80 여명이다. 적은 숫자가 아닐 터. 숫자보다도 술집 여주인부터 박정희 대통령까지, 민노당 대표 권영길부터 대선후보 이회창까지, 보수 논객 선우휘에서부터 진보를 넘나든 이병주까지, 일본의 요시오카 다다오부터 미국의 토마스 울프까지 그야말로 끝이 없는 문주(文酒) 행전(行傳)이다.

지금도 책이 출판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직접 구입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야사(野史)에 포함될 수 있는 이야기 몇 개만 소개하고 서평의 소임을 마치려고 한다. 

제4부 '박정희 대통령과 언론인 송건호'에 담겨 있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이 언론사 정치부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거나하게 술을 내는 자리였다고 한다. 일 순배 이 순배... 여러 차례 술잔이 돌아 모두들 취했을 무렵, 송건호(당시 동아일보 정치부장)와 박 대통령이 동시에 소피를 보러 화장실에 갔다. 소피를 보면서 박 대통령이 송근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박 대통령은 강직한 송건호를 좋게 보고 있었다.

"송 선생, 내가 송 선생을 무언가 한 가지 꼭 도와주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어떤 큰 것을 부탁해도 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건호는 이렇게 말했다.

"각하, 요즘 지방에 공장들이 엄청나게 세워졌다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역시 같은 4부에 '전두환과 김지하'에 나오는 얘기다. 남재희가 정치에 입문한 뒤 꽤 시간이 지나서 민정당 서울시 조직책을 맡고 있을 때였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민정당 시도당 조직책을 청와대 옆 안가로 초청해 술자리를 가졌다. 술이 얼큰하게 올랐을 때 전두환이 건의할 게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하라고 은근히 유도하더란다. 전두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남재희가 불쑥 청을 하였다.

"각하, 김지하 시인을 석방해 주십시오."

김지하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무남독녀 외동딸의 남편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붓으로 시(詩)로 글로 독재 정권과 맞선 문인이다. 그의 시 '오적(五賊)'은 오늘날까지 풍자시의 백미(白眉)로 회자되고 있다. 사람은 훼절하고 지금은 시만 외로이 떠돌아다니지만... .

즉석에서 담당 비서를 불러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뒤 김지하는 정말 감옥을 나오게 되었다. 박경리와 가깝게 지내던 남재희가 술자리에서 부탁해서 일이 성사된 것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 제5부 '술이 유죄런가'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민기식 소장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자유당 부정 선거에 협력하지 않아 자유당 경남도당의 압력으로 국방부가 민 소장의 예편을 경무대에 상신하였다. 민 소장은 그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마당발로 소문 난 조선일보 방 사주를 찾아갔다. 방 사주는 경무대 곽영주 경무관에게 부탁했고, 곽 경무관은 국방부 서류를 자기 서랍에 장기간 보관해서 민 소장의 예편을 막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민기식이 육군참모총장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남재희의 <언론ㆍ정치 풍속사>에는 ‘정사가 되어 버린 국방위 회식사건’ 등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이 책은 '나의 주도(酒道) 10개조'로 글이 마감된다. '잡설을 끝내며 반성하는 뜻으로'라는 이름의 부제(副題)를 특별히 단 것으로 보아 이 책의 에필로그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길재(吉再)의 시조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란 소절이 있다. 이 책에 이름을 올린 남재희의 술친구 중 많은 사람이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답답한 사회는 그대로인데 말이다.

발행인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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