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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지금 주어진 곳이 가장 소중한 자리이명재(본 신문 발행인, 철학박사)
이명재 | 승인 2018.12.05 01:51

'한 학기를 마감하며... 사랑하는 학생들에게'라고 제목을 붙이려다가 '사랑하는 학생들에게'를 뺐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섭니다. 하나는 너무나 당연한 수사(修辭)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나(I)'를 생략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당연한 것은 생략하는 것.

선생이 학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이때의 '사랑'은 '정성'과 동의어입니다. 아끼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 . 이런 것들을 총합한 것이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고 정성입니다. 그런 마음을 발동하게 한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두 번째는 저 자신의 위치에서 기인(起因)한 문제로 '학생들'  앞에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 붙이기가 저어됐습니다. 과연 내가 학생들을 사랑하며 정성껏 가르칠 수 있을까? 맑고 밝은 학생들에게 구정물을 튀게 하지는 않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기 초,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같은 과목 수업 경험이 있는 교수님들이 엄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 말 안 듣는다, 별의별 아이들이 다 있다, 성질나더라도 절대 아이들에게 표출해서는 안 된다. 고등학생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등.

그러나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석하는 학생도 거의 없었고, 간혹 결석을 했을 때는 꼭 사유서를 제출했습니다. 모두 피치 못할 이유들이 있었지요. 중간고사 레포트도 100% 다 해 왔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와는 판이한 모습이었습니다. 

수업 집중도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발견'수업이 전공이 아닌 교양 필수 과목이기 때문에 건성으로 듣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더군요.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한 팀의 탈루(脫漏)함도 없이 발표에 임한 학생들이 무척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발표를 위해 동영상과 PPT를 만들어 오고, 팀별로 돌아가면서 발표할 때의 모습은 제게 무척 예쁘게 보였습니다. 이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배우는 일은 협동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갑자기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올로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가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선생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자고 학생은 배우면서 가르치는 자란 말, 우리 학생들과 하는 수업이 제겐 그랬습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상쾌함을 맛 본 현장이었다고나 할까요. 

첫 시간에 제가 한 말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겁니다. 자부심(自負心)-프라이드(self-respect pride)를 가지라는 말 말입니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 다닌다고 기죽지 말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SKY(?)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일류대가 아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있는 그 지점이 최고로 소중한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바울(Paul)은 '큰 산'에 비유됩니다. 바울에게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살아 계실 때 제자로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과 몸에 가시(지병)가 그것이었습니다.

콤플렉스(complex)에 집착하다 보면 좌절하게 됩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A. Kierkegaard)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요.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앞의 콤플렉스를 해결했습니다.

두 번째의 것 즉 몸의 가시도 제거해 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이 만약 몸에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면 자만해져 주의 종으로 바로 설 수 없었다는 말씀이겠지요.

지금의 위치가 최상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도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에 위해(危害)를 가해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또 정직합니까. 이런 상태를 변치 않고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학기 우리의 수업 강의명은 '기독교의 발견'이었지만 기독교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목사인 제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지시와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종교를 강요하는 듯한 일에는 더 멀리 달아나고 맙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 중 기독교인은 20%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0%가 넘는 학생들이 넌(non) 크리스천이라는 얘깁니다. 이 학생들에 대한 신앙적인 배려는 뭘까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서서히 점진적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강의 교안(敎案)도 거기에 맞춰 짰습니다. 먼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했지요. 거기에 더해 현 시대를 대표하는 두 단어, ‘디지털’과 ‘글로벌’을 결합시켜 발표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디지털의 역기능이 위험 수위에 와 있는 지금,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더듬었습니다.

이런 배경 지식과 신앙의 가교(架橋) 위에 기독교의 기본인 하나님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와 한국 기독교 130년의 역사를 훑어보았지요. 개신교의 안착과 발전은 앞서 들어온 가톨릭 신자들의 순교에 힘입은 바 큽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기독교 경전에 대해서입니다. 구약39권, 신약 27권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고, 구성은 어떠하며 개략적인 의미는? 맡은 팀이 잘 발표함으로써 학생들의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 줄 수 있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약2:26). 행할 때만이 믿음의 참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그것의 행함은 봉사하는 생활, 나누는 생활로 귀결됩니다. 크리스찬은  봉사와 나눔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삶이 체화(體化) 될 때 행복감에 젖게 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발견'을 공부하는 것은 이 분을 만나기 위해섭니다. 기독교에서 '기독(基督)'이 크라이스트(Christ)의 가차(假借) 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시간을 갖고 우리의 지적 욕구를 다시 한 번 정제(整齊)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과학과 대척 관계에 있는지 살펴봅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어떤 분들일까요. 그들을 나름대로 뽑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7명의 목사 중 하나이자 1세대 부흥강사로 이름을 날린 길선주, 숯장수로 시작해 목사가 되어 일제 식민초기 항일에 앞장 선 전덕기, 그리고 영원한 청년이자 한국 YMCA 총무로 불꽃을 밝혔던 이상재가 발표 대상에 올랐습니다.

깡패 출신 목사 김익두는 신유(神癒)의 은사로 당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다녔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김익두 만큼 신문에 자주 오르내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에 갇혀 순사(殉死)한 주기철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정신은 순교자의 전범(典範)입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받아들여 '사랑의 원자탄'이 된 손양원 역시 6.25 와중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으로서 우리나라에 의료 선교사로 온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3.1독립선언 33인(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에 그를 넣어 34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제암리 집단학살 사건을 조사해서 세계에 알린 그의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중 헐버트(Homer Hulbert)도 다루고 싶었으나 빠지게 되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 두 사람을 발표했는데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와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가 그들입니다. 목사요 빈민운동가요 노동 및 농민운동을 펼쳐 일본의 국격(國格)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가가와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 인물입니다. 여기에 우찌무라도 뒤지지 않지요. 이들은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공공연히 비판한 일본의 살아 있는 양심들입니다.

이분들을 공부함으로써 여러분들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준비해서 공부하고 발표한 이 분들과 동일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요. 아니, 시대 상황과 여건이 많이 변화된 지금 그분들과 같은 삶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 세상을 보는 눈은 닮을 필요는 있습니다.  그분들은 내면에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비트포겔(Karl A. Wittfogel)은 <동양적 전제주의>란 책에서 '동양인은 절대자에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폄하의 말을 했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찌 동양인에게만 국한된 얘기일까요.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라면 동서고금(東西古今)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절대자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첫 시간에 강조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기(氣)'로 충만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기서의 '기'는 선한 마음, 신뢰를 주는 마음, 그래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고 늘 함께 있고 싶어하는 대상이 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나'로 인해 가라앉은 분위기가 살아나고, 조직이 활성화되고 사회가 밝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항공사 승무원 등 서비스 업계로 진출해서 일할 사람들이니까 특히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행복 바이러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말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 이것은 학벌보다 중요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보다 중요합니다. 주어진 모든 환경을 압도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그런 자리에 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축 쳐진 몸이 스멀스멀 되살아납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 좋겠지요. 한 학기 동안 수고하셨어요. 또 강의로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정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학생들을 그려봅니다. 건투를 빌며…

* 이 글은 호서대학교 항공서비스학과 1학년, "기독교의 발견" 마지막 수업(12월 3일) 강의 원고입니다. 원래 글의 제목은 '한 학기를 마감하며....'입니다. 함께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아 게재합니다.

이명재  lmj22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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