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시인(1964-2018). 뉴시스 사진

                                  허수경(시인)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 허수경이 갔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암과 싸우고, 아니 동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는 꽤 오래 전이다. 그런 몸으로 시를 쓰고 여행을 하고 또 멀리 유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여느 사람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늘 조용한 채로 일들을 조근조근 해 나갔다. 그런 허 시인이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이다.  암과의 동거를 마치고.... 그의 시 '포도나무를 태우며'가 떠올랐다. 시의 문장에 마침표가 없는 것을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 챘으리라. 그는 종말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갈 뿐. 이 시는 그의 자전적 시가 되고 말았다. 암세포가 점점 퍼지는 것은 포도나무가 타들어가는 것과 흡사하다. 아니, 같다. 흐르는 시간도 다 같은 시간이 아니다.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가혹하다. 가혹하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고 그만큼 시간의 흐름이 더디다는 것을 뜻한다. 정거장에서 이별하는 두 별과는 분명 다른 시간이고 죽음일 것이다.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딱 허 시인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그녀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안고 가을에 승천을 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달이 지는 것처럼....(耳穆).

편집부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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