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시사평론가)

한때 귀가시계로 불렸던, 유명한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 "윤재용" 회장이라는 재벌이 나온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돈을 모으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신이 아버지의 어두운 사업을 물려받는 것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려운 사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을 삼청교육대에서 빼내 주는 조건으로 그녀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약속을 한다. "그럼 언제부터 일을 시작할거냐?" 라는 아버지의 물음에, 그녀가 "그 사람 나오는 걸 보고 하겠다" 고 하자, 윤재용 회장은 "그래, 거래는 그렇게 하는거다."라고 흡족해 한다. 받을 것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용의 삼성이 180조원의 투자를 발표했다. 경제부총리가 대기업에 투자를 구걸하는 듯 보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알려진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예정된 대로 혹은 예정보다 일정을 조금 늦춰서 해당 투자계획은 발표되었다.  

이것은 약속이나 계약이 아니라, 발표일 뿐이므로 이것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무슨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훗날 누군가가 이 계획이 이행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다고 해도, "180조원이 누구 집 개 이름인가? 여건이 되어야 투자를 하지!" 이렇게 정색을 해도 누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그냥 단순한 계획일 뿐인 것이다. 

삼성 미래전략실 장충기 사장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언론계의 향기 나는 동생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이러한 투자계획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실형의 기로에 서있는 이재용에게 좋은 언론플레이 재료가 될 수 있다. 투자계획이라는 공수표를 날리고, 실형을 면한 뒤, 추후 투자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한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여론형성 방식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김동연 부총리가 14조원이라는 소박한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를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초일류기업 삼성의 총수에게 법의 잣대를 일반 국민과 동일하게 들이대는 것은 애초에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 와중에 180조원의 투자계획은 그들이 일반 국민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삼성과의 혈맹관계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언론계에 낮게 엎드려, 소소한 칼럼으로 아직도 여론의 향방을 조정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구걸하지 마라던 청와대의 비공식 입장은 이재용에게 법의 잣대를 엄격히 적용하겠다는, 현 정부의 초심이 유지되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편안하다. 

국민의 위임을 받아 대법원장 일을 보던 양승태가 상고법원이라는 그네들만의 목표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던, 그 대법원에 아직 이재용의 운명이 달려있다. 

180조원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모를, 한 보따리를 들고 와서, 고위관료와 언론을 통해 품격 있게 거래를 제안하는 모습에, 거상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명박, 최순실, 양승태, 이 세상 모든 것은 거래가 가능하다고 믿는 거래의 달인들 사이에서, 묵묵히 일해서 월급을 받아먹고 살든지,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먹고 살든지 하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법은 과연 만인에게 평등한 것인가?
너무 순진한 질문에 헛웃음이 난다. 

김병희  gcilbo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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